공장 옆 '1평' 창고도 마음대로 못 짓는 중소기업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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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위원회·XX위원회' 전국 각종 위원회만 2만7000개경기 부천에 위치한 한 식음료 유통회사. 이 회사는 회사 초기부터 있던 창고 두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허가 창고를 사용하고 있다. 단 3.3㎡(1평) 규모의 창고를 짓는 데도 복잡한 '위원회 규제'를 통과해야되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창고가 소규모든 대규모든 상관없이 기업들은 예외없이 장기간의 도시계획위원회의 장기간의 심의를 받아야한다. 회사 관계자는 “심의 과정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이러저런 수정 요구를 반영하다보면 시간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다”며 “차라리 걸리면 벌금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그냥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절차 간소화가 절실하다”고 했다.
새로운 '규제원천지'된 위원회 제도
현장 기업인들, 간단한 도로 굴착공사도 몇달 기다리고
VR 게임기기 부품만 바꿔도 재심사
기업들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각종 위원회의 규제 심의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전국 2만7000개에 달하는 각종 위원회가 ‘중복·과다 규제’의 또 다른 원천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권명호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기업 관련 위원회 규제제도 개선 연구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각종 위원회는 지난해 6월말 기준 2만6980개 였다. 중앙정부에 도시개발위원회, 토지이용 인허가조정위원회 등 585개, 지방자치단체에 환경평가영향위원회, 도시계획위원회 등 2만6395개다. 지자체 당 평균 109개 위원회가 설치·운영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기업이나 민간에 대한 인허가 등을 결정할때 전문가, 교수 등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이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각종 위원회가 명백한 기준 없이 즉흥적으로 설립·운영되면서 위원회가 우후숙준 늘어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원회 난립으로 기업은 중앙과 지방, 광역과 기초, 기초 지자체간 중복 심의까지 받는 경우도 빈번하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위원회 결정에 불만 있어도 의견을 제기할 기회조차 없고, 기회가 생겨도 형식적이이서 전혀 반영이 안된다”고 토로했다. 위원회 운영상 이의신청절차를 두고 있는 곳은 10% 남짓인 2862개에 불과하다. 3개 중 2개 꼴인 1만8000여개 위원회는 회의 내용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공무원들은 위원회 심의를 거친만큼 문제가 없다는 책임 회피 수단으로도 위원회를 활용하고 있다. 권 의원은 “대한민국은 위원회 공화국이라 할만하다”며 “각종 위원회의 난립과 졸속 운영으로 행정에 전문성과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OO위원회·XX위원회' 전국 2만7000개...'규제원천지'된 위원회에 신음하는 기업들
“실효성 없는 위원회의 과다 심의로 중소기업 대부분은 그냥 법을 안지키고 있는 실정입니다”경기도 김포소재 한 식음료 유통회사 사장은 3.3㎡(1평)짜리 창고까지도 복잡한 위원회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대해 이같이 말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는 “벌금을 차라리 맞는게 낫고, 벌금이 너무 쎄지면 집행전에 건물을 부셔버리기도 한다”며 “이렇다 보니 애초에 부수기 쉽게 가건물로 지어 놓는데 안전문제까지 생기고 있다”고 했다.이 회사의 경우만이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다양한 과다·중복 규제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간단한 도로 굴착 공사도 10m 이상이면 분기당 1번 열리는 도로관리심의위원회의 검증을 받거나, VR(가상현실) 게임 기기의 부품만 일부 바뀌어도 재심의를 받아야 하는식이다. 중기인들은 “간단한 절차로도 가능한 것들을 장기간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한 위원회 심의를 거치라고 하니 경영에 적잖은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면서 “전문가들을 형식적으로 참여시켜놓고 공무원들은 책임을 회피하는 ‘면피용’으로 위원회가 활용되는 것 같다”고 했다.
‘부실 운영’ 낳고 있는 부실 위원회 제도
권명호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기업관련 위원회 규제제도 개선 연구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위원회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기도로 4104개였다. 서울이 2900개로 2위였다. 기업, 인구가 밀집한 수도권에 위원회도 역시 많았다. 이밖에 경북 2340개, 경남 2060개, 전북 전남 강원 1966개 등 순이었다. 전국에 2만6395개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하지만 연구팀 조사에 응답한 2만1188개 위원회 중 결정에 문제가 있을 시 이의신청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곳은 2862개에 그쳤다. 다수의 위원회는 전문성과 객관성과 직결되는 의사결정 및 구성 방식 등을 제대로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이라는 본래 취지에 맞춰 관계인의 의견청취 절차를 법령이나 조례에 규정하고 있는 위원회도 4674개에 머물렀다. 회의를 공개하고 있는 건 8711개뿐이었다. 이러다보니 위원회가 지자체별로 자의적으로 설치·운영되면서 중복 및 과다 규제를 양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규제에 신음하는 규제자유특구
실제 산업 현장과 맞닿아 있는 중기인들에 대한 과다 규제 사례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도로 굴착공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 제도에 따르면 10m이상의 도로굴착 공사를 하려면 도로관리심의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아무리 긴급성이 있다해도 예외는 없다. 하지만 도로관리심의회는 1년에 단 4번만 열린다. 급하게 굴착공사가 필요한 경우에도 무작정 위원회가 열리길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다.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국판 뉴딜을 추진한다며 강조한 자동차, 바이오 헬스 등 각종 분야의 규제자유특구도 위원회 규제로 신음하고 있다. 지자체장이 기업수요에 맞춰 특구 규모를 단 10%이상만 조정하려 해도 지역특화발전특구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을 만들겠다는 본래 취지와 정반대로 지나치게 협소하고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있다.
“전문성과 객관성 정비할 제도개선 필요”
규정 부실로 불필요한 중복 심의를 받아야 하는 사례도 많았다. 성장산업인 VR(가상현실) 콘텐츠 사업자는 게임장 등에 콘텐츠를 공급할때 게임의 내용이 동일하더라도, 체험시설의 규모가 2인승이냐 4인승이냐에 따라 심의를 다시 받아야 한다. 부품 교환 등 하드웨어 외관의 일부 사양이 변경되더라도 마찬가지다. 거기다 심의를 받기위해서는 VR기기를 위원회 심의가 일어나는 곳까지 운반·설치해 직접 심사를 받아야한다.개발구역이 두 행정구역에 걸쳐있는 경우도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두 구역 위원회에서 모두 심의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A시와 B시에 걸쳐있는 토지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두 지자체 소속 도시계획위원회에 심의를 두번 받아야 한다. 두 지역의 심의 기준이 다른 경우 사실상 같은 땅인데도 다른 기준으로 심의를 준비해야한다.
전문성·객관성 부족에 대한 지적도 쏟아진다. 한 중기인은 “내용을 잘 모르는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다른 중기인은 “실제 해당 지역에서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위원으로 참여해 다른 업체 관련 심의를 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중립성에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고 했다.보고서를 대표 작성한 이영범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광역-기초, 기초-기초 지자체간 통합 심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 개선이 있어야하고, 긴급한 경우 활용할 수 있는 패스트트랙 제도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위원회 회의록을 의무적으로 공개하게하고, 불필요한 위원회를 정리하기 위한 위원회 일몰제 등도 필요하다"고 했다.
성상훈/민경진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