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지자체 위원회 2만7000개…공장 옆 '1평 창고' 지어도 규제

기업 잡는 '위원회 공화국'

10m 이상 도로굴착 공사하려면
연4회뿐인 도로심의위 기다려야
VR기기 부품만 바꿔도 재심의

中企 "위원회 탓 범법자 될 판
일몰제·통합심의 도입 등 절실"
경기 부천에 있는 한 식음료 유통회사. 이 회사는 초기에 있던 창고 두 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허가 창고를 지어 사용하고 있다. 단 3.3㎡ 규모의 창고를 짓는 데도 부천시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따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위원회가 요구하는 게 너무 많고 시간도 오래 걸려 창고를 지을 때마다 심의를 받는 건 불가능하다”며 “불법인 걸 알지만 그냥 쓰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각종 위원회의 규제 심의로 고통받고 있다. 지자체는 기업, 민간에 대한 인허가 등을 결정할 때 교수·전문가의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이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2만7000여 개로 불어난 각종 위원회가 ‘중복·과다 규제’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명호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위원회 규제제도 개선 연구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각종 위원회는 지난해 6월 말 기준 2만6980개였다. 중앙정부에 도시개발위원회, 토지이용인허가조정위원회 등 585개, 지자체에 환경평가영향위원회, 도시계획위원회 등 2만6395개가 운용 중이다. 지자체별로는 경기도가 4104개로 가장 많았고, 서울(2900개) 경북(2340개) 경남(2060개) 등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실태조사에 응한 2만1188개 위원회 중 결정에 문제가 있을 때 이의신청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곳은 10% 남짓인 2862개에 그쳤다. 다수 위원회는 전문성·객관성과 직결되는 의사결정 및 구성 방식조차 제대로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이해관계인의 의견청취 절차를 두고 있는 위원회는 4674개에 불과했고, 회의를 공개하고 있는 곳도 8711개뿐이었다. 권 의원은 “대한민국은 위원회 공화국이라 할 만하다”며 “각종 위원회가 졸속 운영되면서 행정에 전문성과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과다 규제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도로 굴착공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10m 이상의 도로굴착 공사를 하려면 도로관리심의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이 도로관리심의회는 1년에 단 네 번 열린다. 급하게 굴착공사가 필요해도 위원회가 열리길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VR(가상현실) 게임 콘텐츠 심의는 중복 심의의 대표적 사례다. 게임 내용이 동일하더라도 2인용이냐, 4인용이냐에 따라 심의를 다시 받아야 한다. 거기다 심의를 받기 위해서는 위원회 회의실까지 직접 VR기기를 운반·설치해 심사를 받아야 한다.

토지 개발구역이 두 행정구역에 걸쳐 있는 경우에 대해서도 지적이 나온다. A시와 B시에 걸쳐 있는 토지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두 지자체 소속 도시계획위원회에 심의를 두 번 받아야 한다. 두 지역의 심의 기준이 다르면 사실상 하나의 땅인데도 다른 기준으로 심의를 준비해야 한다.

이영범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중복 심의를 막기 위한 통합 심의제도나 긴급한 경우 활용할 수 있는 패스트트랙 제도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위원회 회의록을 의무적으로 공개하고, 불필요한 위원회를 정리하기 위한 ‘위원회 일몰제’ 도입을 제안했다.

성상훈/민경진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