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감성 충만한 '피가로의 결혼'…시대를 앞서간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

류태형의 명반순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난 스물다섯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다. 스물여섯에 콘스탄체와 결혼하고 서른 살 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했다. 선배인 하이든과 후배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모차르트 외에도 빈의 음악가는 많다. 태어난 곳 잘츠부르크와 환영받았던 프라하도 각자 모차르트의 지분을 주장할 만하다. 하지만 빈 왕궁 정원의 모차르트 동상과 높은음자리 화단 앞에 서면 빈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모차르트임을 인정하게 된다.

‘피가로의 결혼’에는 수많은 명반이 존재하지만 에리히 클라이버가 빈 필을 지휘한 1955년 데카 녹음의 위치는 확고하다. 스테레오 초창기라는 시간과 빈이라는 공간이 맞아떨어졌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향기를 잃지 않는 전설의 명연주다. 모차르트의 체취가 배어 있는 빈 국립오페라에서 활약했던 가수들은 빈의 음악적인 전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지금은 에리히 클라이버가 카를로스의 아버지로 유명하지만 예전엔 반대로 카를로스가 에리히의 아들로 불렸다. 아버지 클라이버의 템포는 미묘하다. 빠르게 몰아칠 때도 급하단 느낌이 들지 않고, 느긋하게 새길 때도 진한 잉크로 그린 펜화처럼 전체 그림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왕년의 명가수들이 저 앞에서 노래하고 찰랑거리는 쳄발로를 곁들여 레치타티보로 속삭이는 걸 들으면 당대 데카 녹음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를 느낄 수 있다.

가수들 중 가장 먼저 귀를 잡아끄는 주인공은 수잔나로 분한 소프라노 힐데 귀덴이다. 카페 아인슈페너의 휘핑크림같이 부드럽고 민첩한 가창은 섹시하면서도 청순한 이율배반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백작부인 역의 리사 델라 카사는 ‘그리운 시절은 가고(Dove Sono)’를 귀족적이면서도 기품 있게 해석했다. 둘이 부르는 ‘포근한 산들바람(Che Soave Zeffiretto)’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흘렀던 자유의 상징이다. 귀덴과 델라 카사의 가창은 서로를 보완하며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녹음했던 음반이다. 다시 들어봐도 싱싱하다. 모차르트의 빈을 느끼고 싶다면, 좋았던 옛 시절을 보고 싶다면 언제든 꺼내 들을 수 있는 타임캡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