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엔 '성명', 中·러엔 '침묵'…민주화 인사 국적 보는 정부 [송영찬의 디플로마티크]

외교부, 미얀마 쿠데타에 "수치 석방하라" 성명
나발니 구금에는 "예의주시" 답변만
러시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 AP
아웅산 수치, 조슈아 웡, 알렉세이 나발니.

2021년이 시작된지 이제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국제 뉴스에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연일 등장합니다. 자국의 전체주의 정권에 대항한 이들은 정작 자국 내에서는 누군가에게는 ‘민주화 운동가’, 누군가에겐 ‘반(反)체제 인사’로 평이 극명히 갈립니다. 하지만 제3국에서는 대부분 이들을 민주화운동가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대통령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반정부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혹은 선거에서 압승했다는 이유만으로 구금됐기 때문입니다.
지난 1일 쿠데타로 군부에 의해 구금된 미얀아의 민주 운동가 아웅산 수치 전 국가고문./ AP연합뉴스

○러시아 나발니 구금에는 “예의주시”

“우리 정부는 최근 미얀마 내 정치적 상황에 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정부는 지난 2일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이같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지난 총선에서 표명된 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열망을 존중한다”며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등 구금된 인사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하며, 합법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라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미얀마 군부는 지난 1일 쿠데타를 단행하고 총선을 재실시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수치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은 지난해 11월 총선 당시 전체 선출 의석의 83.2%를 석권했는데 이것이 부정선거였다는 주장입니다. 정부가 외교부 대변인 성명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열망’이라는 문구를 포함한 것은 미얀마 군부의 이같은 주장을 겨냥해 ‘지난 총선은 민주적인 선거였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미얀마 쿠데타 직후 성명을 발표한 것과 달리 정부는 그보다 불과 며칠 전 일어난 러시아 정부의 나발니 체포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공식 성명이 없었던 것은 물론 나발니 구금에 대한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 외교부 당국자는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답변만 반복했을 뿐입니다.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시 나발니가 지난 2일 모스크바 법원에 출석해 아내 율리아를 향해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는 모습. 법원은 화장품 회사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와 관련해 나발니에게 선고했던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AP 연합뉴스
나발니는 지난해 8월 독극물 중독 증세를 보이다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독일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서야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나발니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소속 독극물 팀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지난달 17일 러시아로 돌아간 나발니는 귀국 직후 공항에서 체포됐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법원은 2014년 나발니가 프랑스 회사로부터 3100만루블(약 5억9000만원)을 불법 취득한 혐의를 씌워 징역 3년6개월 집행유예 5년 선고에 대해 집행유예 판결을 취소하고 실형으로 전환하라고 판결했습니다.우리 정부와 달리 국제사회는 나발니에 대한 실형 선고에 반발했습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나발니에 대한 독살 시도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대해 “미국은 이번 주말 러시아 전역 도시에서 시위대 및 언론인을 상대로 가혹한 수단을 동원한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다”는 성명도 발표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2일 “평화 시위대에 대한 폭력은 중단돼야 한다”며 러시아 정부를 정면 비판했고 독일 정부 대변인은 “나발니는 즉각 석방돼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홍콩보안법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 중국 공안에 의해 구금된 조슈아 웡./ AP연합뉴스
2019년 홍콩에서 홍콩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민주화’를 외친 시위에서 수천명이 중국 공안에 체포됐지만 끝내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여행경보’만을 발령했을 뿐입니다. 당시 홍콩에서 집회를 주도해 수감 중이던 조슈아 웡은 지난달 7일 결국 홍콩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중 체포됩니다. 국가 전복을 꾀한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홍콩보안법은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 등 4가지 범죄를 최고 무기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비민주적인 ‘악법’입니다.

조슈아 웡은 지난해 6월 “과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한국 정부가 홍콩 편에 서달라고 다시 한 번 간절히 호소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달 홍콩 보안법이 통과되자 김인철 당시 외교부 대변인은 되레 “정부는 1984년 중·영 공동성명의 내용을 존중하며, 공동성명과 홍콩 기본법에 따라 홍콩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하에서 고도의 자치를 향유하며 안정과 발전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중국 입장을 두둔하는 입장을 발표합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달 5일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는 모습./ 뉴스1

○외교 영향 없는 나라에만 한다? “NO”

우리 정부가 나발니나 웡의 체포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지 못한 것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입니다. 외교부 대변인 성명은 가장 정제된 정부의 공식 입장입니다. 그만큼 타국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성명이 발표된다면 양국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외교부 대변인 명의 성명은 총 85건이 나왔습니다. 이중 국제 협력체 차원의 성명 등을 제외하고 특정국의 현안에 대한 성명이 64건입니다. 대부분 해당국에서의 테러 등을 규탄하는 성명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간 평화·우호 공동선언에 대한 환영 성명 등 외교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나라에 대한 성명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은 외교적으로 덜 중요한 소위 ‘약소국’에 대해서만 나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외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인 일본에 있어서는 유독 예외였습니다. 정부의 특정국 겨냥 성명 64건 중 일본을 겨냥한 성명만 15건이었습니다. 전체의 23%에 해당합니다.

사실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정부가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국가에 따라 그 잣대가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17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중 정상회담에서 “역사적으로 남북한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국가 원수가 제3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발언을 했음에도 외교부는 이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시 주석은 한술 더 떠 지난해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 전쟁’이라며 중공군이 참전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전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항미원조’는 단순히 6·25전쟁을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북한의 남침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미국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북한을 도왔다는 뜻이니깐요. 사실상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이었음에도 외교부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에 떠밀려 강경화 장관이 국회에서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국제적 논쟁이 끝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도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그 어디에도 중국 정부에 대한 유감 표명은 없었습니다.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보면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한국의 최대 무역 교역국인 중국과 북핵 문제에 있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중요한 이웃 국가인 일본에는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2월 구속 수감된 상태로 법원으로 향하는 홍콩 민주화운동가 조슈아 웡./ AP연합뉴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단순히 국가 대 국가 외교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소위 ‘상식적인’ 국가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필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지나치게 경도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갖는 나라들이 북·중·러 3국이라는 사실이 바람직한 상황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거대한 중국 영토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는 홍콩의 자유를 외치다 사실상 종신형에 처해진 20대 대학생의 말이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홍콩 문제가 40여년 전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같다는 것을 깨닫기를 촉구합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