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속 팬데믹과 '헬리콥터 머니' [여기는 논설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최근 대표 발의한 ‘코로나 감염병 극복을 위한 손실보상 및 상생 특별법’이 크게 논란이 됐었다. 영업금지·제한 등으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에 대해 손실의 50~70%를 국가가 지원하자는 것인데, 재원 마련을 위해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한국은행이 매입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게 문제였다.

유통시장도 아니고 발행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한다는 것은 한은이 찍어낸 돈으로 국채를 직매입한다는 뜻이다. 이는 중앙은행이 정부 부채를 떠안는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이며,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살포한다는 의미에서 '헬리콥터 머니'나 다름없다. 이는 화폐가치 하락, 초인플레이션 등 폐해가 워낙 커 여러 나라에서 법적으로 금지돼 있거나 삼가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코로나19의 발발이 '헬리콥터 머니' 같은 극단적 사고에 대한 전통적인 금기를 허물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순 없다.'헬리콥터 머니'는 거시경제학에서 자주 논란이 돼온 개념이지만, 역사적으로 실행된 사례는 흔치 않다. 전염병 대유행 상황과 맞물려서는 더욱 그렇다. 찾아보면 1630년 이탈리아 베네치아공화국이 추진한 전염병 경제복구계획의 금융처방이 대표적이다. 최근 유럽 경제정책연구센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영국 런던경제대 찰스 굿하트 교수 등의 공동논문이 당시 금융정책을 반추해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전염병이 창궐한 중세 유럽 도시
베네치아공화국이 계속된 전쟁으로 기근과 흑사병 대유행을 겪은 것은 1629~1631년 때였다. 1630년 9~12월에만 2만명이 사망하는 등 3년 새 총 4만3000명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약 14만명의 인구가 10만명으로 쪼그라든 팬데믹 사건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이 발생하면 정부는 두가지 목표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진다. 감염병 확산을 막는 '봉쇄정책'이 인명 손실을 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 따른 경제적 대가(비용)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이미 1490년에 보건소를 설립하고 전염병 발생 시 펼칠 공공정책들을 마련했다. 당시 한 상인은 '적지 않은 인구가 티푸스나 다른 전염병이 아닌, 순전히 실업의 여파로 사망했다'며 봉쇄 해제를 간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베네치아 의회 상원은 격리·통제되는 부문의 고용 및 명목임금 손실을 보전키로 했다.
주요 유럽도시 화폐들에 대한 베네치아의 환율. 1620~1650년 환율이 급변동했다.
문제는 이런 재정정책 시행을 위한 재원조달 방법이다. 베네치아공화국은 당시 지로(Giro)은행의 환계좌를 이용해 이 자금을 조달했다. 때문에 1630년 4월부터 두달간 통화공급량은 약 30% 늘었다. 과거 수세기 동안 겪어보지 못한 통화량 증가다. 분배문제로 촉발된 폭동은 파장이 심각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의 통화공급 확대 유인은 클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의 화폐가치는 폭락했고, 중앙은행에 대한 정부 구제조치도 뒤따라야 했다.

베네치아공화국의 헬리콥터 머니 살포는 정치적 동기에 따른 재분배 정책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정책은 향후 발생할 세수(稅收)로 부채이자를 상환하는 것이었는데, 베네치아의 세금은 역진적이어서 결국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단기 재분배가 부자들에게 유리한 장기 재분배로 탈바꿈하게 됐다. 이는 베네치아 경제사회가 쇠퇴하는 전환점이 됐으며, 부(富)의 불평등에도 큰 영향 미쳤다.

베네치아 경제사를 예로 든 이 논문은 코로나 위기라고 돈을 헬리콥터에서 뿌리 듯하면 단기적으론 저소득층이 이익을 약간 보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고소득자에게 이익이 돌아가 '부익부 빈익빈'을 몰고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듯하다. 역진적 세금구조를 가진 무려 400년 전 경제사이지만, '헬리콥터 머니'와 '부채의 화폐화'란 정책 틀은 지금도 'K자형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점을 되새겨볼 수 있다. 4차 긴급재난지원금의 보편·선별 지급 여부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의 혼선에다 대선 유력주자의 기본소득 제안이 다시 부각되면서 팬데믹 상황의 국가 재정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경제사 속에 담긴 정책적 함의와 교훈도 잘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