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의 콘텐츠인사이드] 텅 빈 극장을 채우는 두 개의 불꽃

김희경 문화스포츠부 기자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
극장 안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최근 두 편의 영화를 볼 때 모두 그랬다.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Soul)’과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무한열차 편’이다. 성인들이 왜 애니메이션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하나의 공통된 화두를 던진다. 당신의 마음속 ‘불꽃’이다. ‘소울’은 그 불꽃이 무엇인지 관객 스스로에게 질문하도록 한다. ‘귀멸의 칼날’은 곧 꺼질 것만 같은 불꽃도 다시 타오를 수 있다고 다독인다.

일상의 불꽃, 의지의 불꽃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극장들엔 적막이 흘렀다. ‘1000만 관객’ 영화의 수를 헤아리던 것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루 평균 1만 명대 관객 수로 최저 관객 기록을 연일 경신하며 해를 넘겼다.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소울’과 ‘귀멸의 칼날’. 지난달 말 잇달아 개봉해 조금씩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두 작품을 본 관객은 14일 기준 각각 156만 명, 62만 명이다. 이들은 극장 문을 나서며 불꽃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한다. 사람들은 왜 두 개의 불꽃에 반응하게 된 걸까.

코로나19 이전이라면 아마 미국,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극장을 포함해 영화계 관계자들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극장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관객들의 마음이 조금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소울’은 아름다운 재즈 선율과 함께 일상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이야기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조 가드너가 꿈에 그리던 공연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며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는 꿈보다 더 중요한, 그러나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해준다. 나를 둘러싼 공기, 바람, 가족의 웃음 등이다. ‘소울’을 보고 난 관객이라면, 극장을 나서며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바람결을 느껴보려 했을 것 같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무한열차 편’.
‘귀멸의 칼날’을 보면 처음엔 당황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이 작품이 지브리가 만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20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역대 일본 영화 1위를 차지한 비결을 깨닫게 된다. ‘귀멸의 칼날’은 혈귀를 잡기 위한 비밀조직 ‘귀살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들의 혈투 속에서, 꺾일 듯 꺾이지 않는 인간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마음을 불태워라”라는 대사엔 아직 부족해도 온 마음을 쏟는다면, 언젠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불꽃은 삶을 긍정하는 눈물이 되어

서로 다른 두 개의 불꽃에 대한 반응이 눈물로 나타난 건 어떤 의미일까. 이 시대에 ‘눈물 한 방울’이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다는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의 얘기가 떠오른다. 그는 《이어령, 80년 생각》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의 한국인과 한국 문화라면 코로나 같은 시련이 닥치더라도, 불행한 역사에 휘말린다 해도, 연약한 한 소녀의 눈물 한 방울의 힘으로 역사의 물꼬를 바꿔 놓을 수 있다.” 안네 프랑크의 눈물 한 방울이 생각의 날개를 달고 창작물로 부화해 《안네의 일기》가 된 것을 떠올리면 된다.

그 눈물은 결국 ‘삶의 긍정’과 연결되는 게 아닐까. 그리스인들은 현세보다 사후 세계를 동경한 이집트 문명과 달리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직시하고 긍정했다. 그런 그들이 만든 영웅 신화에서 우리는 수많은 눈물과 마주하게 된다. 고난과 역경의 순간 스스로를 돌아보고 눈물 흘리며, 새로운 날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갈 희망을 찾았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유례없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왔다. 아스러질 것만 같은 하루하루, 그럼에도 살아가고 또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불꽃을 찾고 진정한 눈물 한 방울을 흘려야 했다. 그 장소가 극장이란 점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늘 설렘과 감동이 가득했던 곳, 그러나 코로나19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라진 곳. 그곳을 다시 찾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불꽃을 가득 채우고 있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