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재의 산업지능] 기술 중심 대학의 혁신 방향 보여준 '産學 콜라보'

이동형 병동 개발한 KAIST·신성이엔지
논문 아닌 산업현장 중시 '기술'에 집중한
물리적 협업이 경쟁력 높은 제품으로 결실

장영재 < 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
KAIST가 개발한 이동형 병동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같은 재난 상황에서 일반 병원의 수술실이나 병동이 필요한 경우 체육관이나 야외에 신속히 설치해 충분한 병상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개발된 모듈형 시스템이다. 첨단 음압시설도 갖춰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병실 등 다양한 조합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이 이동형 병동은 기술 개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산학협력을 통한 중소·중견기업의 기술 개발 및 시장 개척에서 새로운 롤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번 개발에는 중견기업 신성이엔지가 참여했다. 신성이엔지는 반도체설비 제조 기업이다. 반도체 공장의 특성상 외부 공기를 정화하고 공장 내 공기 흐름을 제어하는 기류제어기술이 필요하다. 신성이엔지는 지난 30년간 국내 반도체 역사와 함께하며 반도체 공장의 기류를 조정하는 시스템의 경쟁력을 다져왔다.이런 기술은 반도체 공장뿐만 아니라 감염병 환자를 격리할 수 있는 응급실이나 수술실, 진료소에도 필요하다. 신성이엔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KAIST와 협업하며 기류제어기술을 음압병동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마침 정부의 코로나 대응 지원사업을 통해 KAIST와 인연을 맺고 연구개발에 나서 6개월 만에 이동형 병동 개발을 완료한 것이다. 첫 제품은 원자력병원에 설치됐다.

정부 기술 지원 사업을 통해 대학은 많은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지만, 세상을 선도하는 기술이 대학 연구실에서 탄생해 시장에 안착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지원사업 결과가 해외논문 게재로 끝날 뿐 산업현장을 혁신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신성이엔지와 KAIST가 협업한 이동형 병동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비결은 기업과 대학의 물리적 협력이다. 산학협력은 대부분 서류상 협업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KAIST와 신성이엔지는 지난 6개월간 거의 매일 온·오프라인 회의를 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정부 지원으로 참여한 원자력병원은 병동의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제시, 현장 의료진이 사용 가능한 제품이 개발될 수 있도록 도왔다. 수요 기업인 원자력병원, 개발기업인 신성이엔지, 기술 개발을 담당한 KAIST의 이상적인 협업으로 현장에서 즉시 활용 가능한 제품을 완성한 것이다.또 다른 성공의 열쇠는 결과 중심 테크놀로지 개발에 있다. 국내에선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이 혼용돼 정책 방향이나 학문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과학과 기술은 그 본질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과학이 돈으로 지식을 만드는 일이라면, 기술은 지식으로 돈을 만드는 일”이라는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의 말처럼 과학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끊임없는 투자가 필요한 반면, 기술은 투자를 기반으로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술의 결과물은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이며 이 과정에서 학문적 의미가 논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아쉽게도 과학이든 기술이든 논문 편수로 결과물을 평가하는 학계 풍토 탓에 대학에서 산업에 기여하는 결과물을 창조해내기 어렵다. KAIST와 신성이엔지는 프로젝트 시작부터 테크놀로지 개발이란 구체적인 결과를 염두에 뒀다. 기술 중심 대학이나 연구자의 평가가 어떻게 바뀌고 개선돼야 할지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KAIST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신성이엔지에 기술을 이전했고 그 대가로 기술료(라이선싱)를 받았다. 매사추세츠공대(MIT)나 스탠퍼드 같은 대학은 기술이전 라이선싱 비용이 공대 예산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국내 학계에서는 이런 기술 라이선싱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대학이 기업의 연구개발을 대신해주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 기업은 기술 혁신에 목말라하고 있다. 학계에서 수년 전에 검증돼 외국 기업에선 활용하고 있는 기술도 있는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다. 대학이 배출한 졸업생이 대학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산업이 없어진다면 대학의 존재마저 흔들릴 수 있다. 졸업생이 갈 수 있는 산업이 없는 나라에서 기술고등교육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