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내려온다 봄이 내려온다…달 밝은 밤 행궁 위로

세계 문화 유산 화성행궁 여행
입춘이 지났건만 겨울은 길고도 질기다.
며칠 따뜻한가 싶으면 또 추위가 몰아친다.
그래도 남녘에서 심심찮게 화신(花信)이 날아드는 걸 보면 대세는 봄으로 기울었다.
전례 없는 감염병 사태라 사람 북적대는 곳은 꺼려지는 나날들. 백신이 보급돼도 예전의 활기찬 일상을 되찾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그래도 집콕만 하기는 오는 봄에, 곧이어 피어날 꽃들에 미안한 일.
한적하게 홀로 걸을 만한 곳을 찾아가보자.
단단한 몸집에 조형미까지 갖춘 수원 화성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옛것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수원 화성은 첩첩산중을 찾아가지 않고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조선시대 제2의 한양으로 불린 화려한 도시 수원에는 거대한 성곽이 도심 한가운데 서 있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주도해 1796년 9월 완공된 수원 화성이다.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 창룡문 등 4개의 대문이 이어진 화성은 수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당당하다. 우리나라 성곽들 가운데 가장 장대하고 우아한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행했던 삶과 죽음이 늘 애달팠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했다. 수원 화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행궁은 왕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곳인데,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다 정조대왕이 1789년부터 1800년까지 11년간 사도세자의 묘를 찾아 행차할 때마다 거처하던 곳이다.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지내면서 진찬연(회갑연)과 과거시험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로 들어서면 무대 같은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신풍루는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가 수원화성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의미가 담겼다. 박제가, 이덕무, 백동수 등에게 지시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를 선보이는 무예24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전통공연이 신풍로 앞에서 열렸다. 1795년, 정조가 굶주린 백성들에게 직접 쌀과 죽을 나눠준 진휼 행사도 있었다. 넓은 마당 한편에는 수령이 60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눈길을 끈다. 힘겨운 세월을 말하듯 상처 입은 고목은 거인처럼 행궁을 지키고 있다. 종이에 소원을 적어 걸어두면 이뤄진다고 해 소원나무로 불린다.

영화와 드라마 속 한류의 중심

화성행궁 신풍루
576칸에 이르는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규모나 쓰임이 으뜸으로 꼽힌다.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당(正堂)으로, 정조는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정조는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화성에서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열어 효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낙남헌에서는 특별과거시험과 양로연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파괴됐는데, 낙남헌은 훼손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건축물이다. 바로 옆에는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의 삶을 꿈꾸며 지은 노래당(老來堂)이 있다. 정조의 어진(초상화)을 모시기 위해 순조 1년에 세운 화령전은 정조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기품 있다.

화성행궁은 사라진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수원 화성의 기획과 시공 과정을 완벽하게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2003년 482칸이 재건됐다. 화성행궁 곳곳의 다양한 쓰임새와 아름다움이 완전하게 드러나도록 여전히 복원 중이다. 정조의 효심과 애민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화성행궁은 ‘대장금’ ‘이산’ ‘왕의 남자’ ‘구르미 그린 달빛’ 등 영화와 드라마 속 풍경에도 담겨 한류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행궁 근처에 있는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은 화성 성벽을 따라 설치된 건축물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조선시대 ‘버드내’로 불린 수원천은 화홍문을 통해 성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성 북쪽 수문인 화홍문은 돌다리 위에 누각을 지었다. 그 아래 7개의 아치 모양 홍예로 장쾌하게 물이 쏟아지는 풍경은 수원팔경의 하나로 불릴 만큼 아름답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의미의 방화수류정은 전시에는 군사 지휘소였지만 수원시내를 굽어보는 전망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신발을 벗어 정자 우물마루 차가운 바닥을 밟고 서면 바로 아래로 ‘용연’이라는 작은 연못이 내려다 보인다. 울타리를 친 듯 연못가를 둘러싼 버드나무가 하늘거린다. 시선을 들어 넓게 바라보면 도심의 풍경이 들판처럼 시원하다.

행궁 근처 예술적 명소도 많아

행궁동 벽화마을
성곽길 주변에 있는 수원화성박물관은 동서양 성곽의 장점과 조선의 창의성이 조화롭게 표현된 수원 화성의 사료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수원 화성의 아름다움과 우수성,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 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마련돼 있으며 2층에서는 화성 축성 과정을 볼 수 있다. 화성 행차 때 정조가 입었던 갑옷이 재현돼 있고,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완질본이 전시돼 있다. ‘화성성역의궤’ 등 화성 축성과 관련된 유물도 있다. 수원 화성과 화성행궁을 바람을 맞으며 가슴으로 둘러봤다면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들을 머릿속에 저장하면서 역사기행에 의미 있는 마침표를 찍어 보면 어떨까.화성행궁 근처에는 예술적 감각이 묻어나는 명소가 많다. 행궁동 벽화마을의 다양한 길에는 세계 예술가, 지역 주민, 자원봉사자가 함께 정감 있고 재치 있는 벽화를 그려 골목을 수놓았다. 갤러리와 카페, 아트숍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어 좁은 길에서 다채로운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벽화 골목길은 눈으로 가는 길, 사랑하다 길, 처음아침 길, 뒤로가는 길, 로맨스 길, 사랑의 쉼터길, 행복하 길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면 꽉 차는 길에서 행궁동 어르신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그린 십장생 동물들이 귀여운 표정으로 반긴다.

쇼콜라의 정원에서는 달콤한 초콜릿 만들어 맛볼 수 있다.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보아요’에서 자물쇠를 하트 모양 벽에 걸어 사랑을 약속하기도 한다. 2014년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를 통해 슈퍼주니어 김희철과 대만 여배우 곽설부가 그린 신랑 신부의 모습은 깜찍하다. 철심이 박혀 녹물이 흘러내린 벽면을 그대로 살려 정조대왕이 좋아했다는 버드나무를 그린 벽화는 화성행궁의 봄을 가장 먼저 전해준다. 사랑과 행복이 담긴 예술길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니 어느새 봄날이 바짝 다가와 있다.

수원=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