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 위로, 모두 모여!

외롭고 지루한 '집콕'…함께 즐기는 놀거리에 빠지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의 주인공 안야 테일러조이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은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비운의 왕’이다.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유명한 이유는 ‘투탕카멘의 저주’로도 잘 알려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때문이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드게임이다. 지금도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서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이 게임은 ‘세네트’라고 불린다. 3×10개 칸의 게임판에서 누가 먼저 말을 모두 움직이는지 경쟁하는 게임이다. 세네트는 기원전 3000년 처음제작돼 지금껏 알려진 보드게임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세네트 외에도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의 게임’과 ‘백개먼’, 인도의 ‘차투랑가’ 등 모든 문명에서 보드게임이 등장했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로 묘사한 것처럼 놀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주사위 하나, 카드 한 장만으로도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 역시 인간의 문명과 궤를 같이한다. 보드게임의 열풍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바둑, 장기, 체스 같은 ‘고전 게임’부터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보드게임까지 끊임없이 신제품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영화와 스포츠, 뮤지컬, 음주가무 등의 다른 놀잇거리를 즐기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보드게임으로 코로나블루 이겨냈죠”

직장인 김연희 씨(30)의 26㎡짜리 원룸 한쪽 벽에는 루미큐브와 젠가, 다빈치코드, 할리갈리, 뱅, 스플렌더 등 보드게임 박스가 쌓여 있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지난해 2월부터 구입하거나 선물받은 것들이다. 김씨는 “한창 코로나19 확진자가 1000명대로 치솟는 시기에 ‘집콕’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보드게임”이라고 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게임을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모바일이나 PC 게임보다 건강한 느낌이라 자주 하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보드게임은 재밌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육 효과도 있다. 사회성과 사고력, 집중력, 승부욕 등을 기를 수 있어 일선 학교에서 보드게임을 수업 교재로 활용하는 게 보편화됐다. 김진오 세종시 다빛초등학교 교사는 “할리갈리와 우봉고, 부루마블 등을 통해 각각 연산과 도형, 지리 등을 익힐 수 있다”며 “팀을 이뤄 경기하는 방식이 많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예절이나 규칙 준수 등을 교육할 수도 있다”고 했다. 기억력과 언어·공간인지력 향상 등 치매예방 효과가 있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버 보드게임도 인기를 끌고 있다.

보드게임 시장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테크나비오는 글로벌 보드게임 시장 규모가 지난해부터 연평균 15%씩 성장해 2024년 58억1000만달러(약 6조45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시장 규모는 따로 집계되지 않지만 판매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얘기다. G마켓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한 지난해 보드·카드게임 매출은 2018년보다 37% 증가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0 게임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보드게임 시장에서는 여러 명이 왁자지껄하게 즐기는 파티게임형 보드게임이 다소 주춤한 대신 혼자서도 플레이할 수 있는 퍼즐류가 크게 늘었다. 롤플레잉 보드게임 실적도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보드게임도 인기

보드게임은 크게 ‘유로게임’과 ‘테마게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로게임은 승리를 위해 치밀한 전략이 필수적이어서 ‘하드 게이머’들이 주로 즐긴다.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주사위 등 전략 못지않게 운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 테마게임이다. 보드게임 사용자 저변이 넓어지면서 업체들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 개발에 골몰하는 모양새다. 강경석 콘진원 산업정책팀 부장은 “교육적인 요소가 있는 게임 위주로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해외에서 인기를 끌었던 게임이 국내에 유통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글룸헤이븐(코리아보드게임즈), 시퀀스(행복한 바오밥), 꼬치의달인(만두게임즈), 더 마인드(팝콘게임즈) 등 국내 업체들이 출시한 보드게임도 선전하고 있다. 콘진원은 “롤플레잉 보드게임 실적이 올랐고, 혼자서도 플레이할 수 있는 퍼즐류는 급격하게 성장했다”며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의 대중화로 자본이 넉넉지 않은 신인 제작자들이 게임 개발을 위한 투자 유치가 수월해진 것도 보드게임 열풍에 한몫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엔 천재 체스 소녀가 등장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의 열풍으로 국내외에서 때아닌 체스 열풍이 불기도 했다. 새로운 보드게임의 홍수 속에서도 부루마블, 젠가, 루미큐브 등 ‘고전 게임’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려 명성을 지키고 있다. 보드게임을 오프라인에서 즐겨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 된 지 오래다. 보드게임 콘텐츠를 모바일로 즐기는 사람도 상당수다. 친구들과 온라인으로 루미큐브나 모노폴리 등을 자주 한다는 직장인 정우영 씨(27)는 “게임판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 간편한 데다 카드를 돌려쓰지 않아도 돼 감염 우려를 덜면서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이인혁/이승우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