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채석강, 내소사, 직소폭포
입력
수정
지면A22
이태백이 놀던 곳과 닮았더냐…꽃도 없고 나무에 물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 계절은 겨울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부안의 2월은 어중간합니다. 신이 깎아놓았다는 채석강도, 소동파의 적벽강과 이름도 같고 생김새도 비슷한 적벽강도 쓸쓸합니다.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내소사조차 비어 있는 액자처럼 꽃의 풍경을 덜어냈습니다. 그런데도 부안으로 여행을 떠난 건 적막하지만 담백한 흑백필름의 서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만권 책 켜켜이 쌓인 듯한 채석강
전나무와 벚꽃터널이 일품인 내소사
부안 여행의 시작점은 내소사다. 내소사를 시작점으로 삼는 이유는 일주문부터 펼쳐지는 600m의 전나무 숲길 때문이다. 숲길을 걸으면 지친 마음에 새살이 돋고 속세의 찌든 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벚나무 터널이 이어진다. 봄이 돼 화사하게 꽃이 피면 푸릇한 전나무와 하얀 벚꽃, 세월의 더께가 묻은 천년 고찰이 조화를 이뤄 그야말로 선계(仙界)의 풍경을 만든다.천왕문을 거쳐 마지막 관문인 봉래루를 넘어서면 내소사 안마당이다. 내소사는 633년(백제 무왕 34)에 혜구두타 스님이 산문을 연 뒤 몇 차례 중창을 거쳐 지금에 이른 천년 고찰이다.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절집 앞에 수령이 1000년이나 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당당히 서 있다.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정수로 인정받는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은 못하나 박지 않고 나무를 끼워 짜맞췄다. 대웅보전의 꽃살문과 단아한 단청은 내소사의 또 다른 볼거리다. 경내는 300살이 넘은 보리수와 돌탑 등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풍경들로 가득하다.
30m 물줄기의 거대한 감동, 직소폭포
내소사를 나와 다시 전나무 숲길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작은 오솔길이 나온다. 이 길로 계속 가면 변산반도국립공원의 대표적 볼거리인 직소폭포로 이어진다. 직소폭포는 내변산에 꼭꼭 숨겨놓은 보물 같은 곳이다. 직소폭포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내변산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다. 길이는 약 2.3㎞. 직소폭포로 가는 길엔 미선나무와 꽝꽝나무 같은 희귀 수종이 있고, 운이 좋으면 천연기념물인 수달도 만나볼 수 있다.직소폭포로 가는 도중 커다란 저수지가 보인다. 1991년 부안댐이 건설되기 전 부안군민의 비상 식수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직소보다. 직소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모이는 직소보는 계절에 따라 다른 풍광을 그려낸다. 직소폭포의 높이는 약 30m.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커다란 물줄기가 직각으로 쏟아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물줄기 밑에는 깊고 둥근 소가 있다.
세월이 만들어낸 명품 적벽강&채석강
부안에서 적벽강과 채석강을 빼면 풍경의 절반을 지워내야 할 것이다. 적벽강은 격포리의 해안절벽 일대 층암절벽과 암반으로 이어져 있다. 당나라 시인 소동파가 놀았다는 중국의 적벽강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적벽강 아래 해변으로 쉼 없이 파도가 일렁인다. 파도는 붉은 절벽의 발목을 간질이고, 바닷물에 몽돌이 세월에 깎여 둥글어지고 있다.적벽강 위를 따라 올라가면 바다의 신을 모신다는 수성당(水城堂)이 있다. 바다를 걸어다니며 칠산 바다를 관장했다는 개양할머니와 그의 딸들을 모신 제당이다. 수성당 아래는 아슬아슬한 절벽이다. 절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개양할머니의 비나리 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적벽강은 특히 해질녘이 아름답다. 노을빛을 받은 바위가 온통 진홍색으로 변하는 풍경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는다. 태안군 안면도의 꽃 할미할아비 바위, 인천 강화의 석모도와 함께 서해 3대 낙조로 손꼽힐 만하다.적벽강과 연결되는 마실길을 따라가면 채석강에 이른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해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채석강은 2017년 전북 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받은 부안의 랜드마크다. 변산 8경 중 하나인 채석범주(採石帆柱)가 이곳을 말한다. 채석강은 수만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지층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무너져 지금의 모습이 됐다. 수만 권의 책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모습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부안의 먹거리 곰소 젓갈과 백합
채석강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곰소만에 닿는다. 곰소만은 줄포만이라고도 부른다. 갯벌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염분이 높아 질 좋은 소금 생산지로 이름났다. 곰소항 근처는 젓갈집 천지다. 곰소만 주변의 어패류와 곰소 염전의 천일염이 만나니 곰소 젓갈의 품질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다. 서해에서 잡은 해산물을 천일염으로 곰삭힌 부안의 곰소 젓갈은 예부터 알아줬다. 부안에서 밥을 먹으면 어딜 가도 젓갈 서너 가지는 나온다.부안의 또 다른 먹거리는 백합이다. 조개의 여왕이라는 애칭답게 조선시대 왕실에 진상하던 식재료다. 도톰하고 뽀얀 속살이 탕, 찜, 구이 등 어떤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백합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이 계절에 먹어야 제맛이다. 한때 부안에서는 갯벌에서 힘들여 걷어내지 않아도 발에 차일 만큼 흔했으나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고 바닷길이 막히면서 백합도 자취를 감췄다. 귀해진 만큼 가격도 비싸졌다. 불린 쌀과 다진 백합살을 센 불에 끓여 참기름을 넣고 천일염으로 간을 하면 고소하고 차진 맛이 일품인 백합죽(사진)이 완성된다.부안=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