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짙어지는 국가주의 그림자

일자리도, 부동산도, 신성장도
굳이 재정투자 고집하는 등
실패 예고된 정부 주도 정책뿐

'시장'이란 쉬운 길 위해
규제 풀라는 호소에 마이동풍
시장 확대의 길이 싫은 것이다

이영조 <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
경제란 무엇인가? 《세속적 철학자들》의 저자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 로버트 헤일브로너에 따르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경제다. 그렇다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은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주된 수단은 전통, 국가, 시장이었다. 원시 부족사회의 경우 전통이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인도 등에 유습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역할이 사라졌다. 결국 현대 경제는 국가와 시장이 각각 생산과 분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 나뉜다.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고 분배도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해 이뤄지는 경제체제는 시장경제다. 반대로 생산수단을 국가 또는 공동체가 소유하면서 분배도 국가를 통해 이뤄지는 경제체제는 통제경제다. 이 밖에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하되 분배는 국가가 담보하는 복지국가형 혼합경제도 있고, 생산수단은 공유하되 분배는 주로 시장이 맡는 시장사회주의형 혼합경제도 있다.한국의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다. 국가의 개입이 적지 않았지만 생산과 분배 활동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되도록 삼갔다. 국가의 역할은 주로 세제와 금융을 통해 시장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그쳤다. 동아시아 발전 국가의 공통된 특징인 이 같은 ‘시장순응형 개입’마저도 1990년대 이후,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크게 줄어드는 추세였다.

하지만 이 같은 추세는 현 정부 들어 역전됐다. 시장의 흐름과 논리에 역행하는 정책이 늘어나고 있다. 규제는 급증하고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의 침탈이 증가하고 있다. 시장에 맡겨도 될 일, 심지어 더 나을 일도 국가가 직접 나선다. 이런 경향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처음부터 많은 경제학자가 마차를 말 앞에 놓는 격이라고 경고했지만 이 정부는 듣지 않았다. 최저임금을 급속히 올리자 임금 부담이 늘어난 사용자들은 일자리를 줄이거나 자동화를 채택했다. 그 결과 일자리가 줄어들어 숫제 소득 자체가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저녁이 있는 일상을 만들어주겠다고 한 주 52시간 근로제도 그렇다. 기업은 기업대로 일손이 줄어 난리고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수입총액이 줄어들어 투잡을 뛰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일자리 정책도 비슷하다. 공무원을 포함한 공공일자리를 늘리고 정부 입김이 닿는 곳에는 팔을 비틀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이건 지속가능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공무원 증가는 재정 부담으로 연결된다. 정규직 전환은 신규 채용을 줄여 청년 실업을 부추겼다.

사실 가장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기업이다. 그런데도 기업 활동에 유리한 환경은커녕 오히려 저해하는 각종 규제 입법을 강행 처리했다. 실업자가 1년 전에 비해 100만 명이나 늘어나자 대통령은 ‘특단’의 대책을 주문했지만, 기업이 고용을 늘리지 않는 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결국은 재정을 투입해 억지로 단기 일자리를 늘리는 과거의 실패한 정책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시장 역행 정책의 대표 격은 부동산 정책이다. 각종 규제로 주택 공급이 줄며 가격이 올라가자 공급은 놔둔 채 수요를 억제한답시고 대출을 규제했다. 그러자 부동산시장은 현금 부자들의 놀이터가 됐다. 24번의 실패 끝에 공급책을 내놨지만, 이것도 실패 가능성이 짙은 정부 주도의 대책이다. 재건축 규제 완화와 같은 손쉬운 공급책이 있지만 이 정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신성장이라는 것도 재정 투자를 통해서 한다. 업계에서는 재정 투입도 좋지만 우선 규제를 풀라고 하는데 이 정부는 마이동풍이다.

쉬운 길이 있는데도 왜 굳이 가지 않을까? 몰라서 그럴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시장을 확대하는 그 길이 싫은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달지만 결국은 국가가 경제 활동의 더 많은 부분을 조직하는 사회로 가고 싶어서 그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더 짙어질 것 같아 두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