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생활의 포트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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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택 < 고려대 총장 president@korea.ac.kr >연구년 기간에 미국에서 만난 대학 선배님으로부터 며칠 전 안부 전화가 왔다. 대기업 보험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한 뒤 사업을 하다 실패해 이민을 간 그분과의 대화는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생활하던 나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 워싱턴DC의 이스턴 마켓에서 자그마한 식품점을 운영하는 그분은 “나는 내 가게를 이병철 씨가 삼성그룹을 경영하듯이 운영한다”고 했다. 앞에서는 “그러시냐”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데 거창하게 삼성그룹과 비교하시나’ 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규모만 달랐지 그 식품점도 하나의 기업이다. 가게 임차료와 종업원 인건비를 계산하는 재무가 있어야 하고, 과일과 채소를 들여오는 구매와 유통업무, 상가에 오는 손님을 우리 가게로 유인하는 마케팅, 심지어 건너편에 있는 경쟁 업소의 취급 물품 변화와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온다는 소문에 대비한 전략기획도 있어야 했다.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업무의 다양성과 내용은 대기업과 다를 바 없다.주인 스스로가 ‘작은 가게’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이런 일들을 주먹구구로 해나가는 경우와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처럼 사고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는 업무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고 당연히 운영 실적도 다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뒤로 나도 어떤 사안을 처리할 때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거창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대유행) 상황은 정부와 기업은 물론 개인에게도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 절박함도 유사하다. 따라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대기업으로부터 배워도 좋겠다. 최근 신문의 경제면을 보면 정보기술(IT) 기업은 물론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 기업의 변화와 혁신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몇몇 기업만 강조하던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기업과 투자자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이제는 기업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개인도 가정에서 분리수거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주변의 소외계층을 돕고,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가정의 분위기를 친밀하고 수평적인 관계로 바꾼다면 분명 우리도 ESG 경영에 동참하는 것이다.
최근 눈에 띄게 사업 다각화와 변화를 도모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은 그룹의 미래 사업 포트폴리오를 자동차 50%, 개인용 비행체 30%, 로보틱스 20%로 구상하고 있다. 기업은 이런 목표와 계획을 세우기 위해 계열사의 역량을 포함한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사회 변화를 예측하며, 전략적 고민을 했을 것이다. 개인도 막연한 워라밸을 추구하기보다는 본인의 취향과 역량 그리고 사회 변화를 분석해 자신만의 생활 포트폴리오를 짜볼 수 있겠다. 일상에서 일과 여가(취미) 그리고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의 비율을 7 대 2 대 1로 정하고 실천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