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쿠팡 대박'에 국부유출 논란 유감

"외국자본도 디지털 전환 자극제
산업 체질 개선 효과 주목해야
토종기업 차별 규제가 더 문제"

이태호 싱가포르 특파원
쿠팡의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 추진을 계기로 일각에서 해묵은 ‘국부유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예상 기업가치만 300억~500억달러(약 33조~55조원)에 달하는데, 결국 배를 불리는 쪽은 외국인 주주라는 사실에 박탈감을 느끼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거래금액 기준 국내 1위 전자상거래업체인 쿠팡의 최대 주주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끄는 비전펀드로 39.4%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도 대부분 외국계 투자회사 소유다. 여기에 주식을 상장하는 ‘둥지’까지 미국행을 택했다. 충성스런 국내 이용자나 공모주 투자자 관점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외국인이 이득을 빼앗아 간다는 이 같은 불만은 외환위기 직후 ‘반(反)외자 정서’란 표현을 낳을 만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적이 있다. 당시 단기차익을 노린 투기자본이 한국의 국가부도 위기를 틈타 국내 자산을 헐값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토종 자본과의 역차별도 국부유출 논란을 키웠다.

이번 쿠팡의 사례는 외환위기 당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쿠팡이 유치한 자본은 국내 유통산업의 고도화와 중소 입점업체의 디지털 전환을 앞당기는 자극제로 쓰였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수평적인 경쟁 지위에서 초고위험 투자에 나서 혁신의 불을 지폈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단지 주주가치 상승 과실을 외국 자본이 챙긴다는 점만 같을 뿐이다. 다소 부풀려 말하면 ‘숲을 조성한 농부가 나무를 베간다’고 한탄하는 격이다.

외국인이 한국의 성장산업을 활성화하고 국내 보수적 투자자들의 각성까지 이끈다면 반대로 투자를 적극 장려해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전자상거래 서비스와 글로벌 온라인 채널에서 선전하는 한국 업체들의 경쟁력은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본의 국적을 불문한 치열한 경쟁 체제 조성이 가져온 성과다.여기에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 효과까지 낸다면 쿠팡의 성공적 상장으로 얻는 한국의 이득은 값으로 따지기 힘들 정도로 크다. 더 많은 기업의 혁신과 경쟁을 채찍질하는 국내외 연료(투자 수요)가 풍부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국적을 따지지 않는, 선도기업 투자유치 정책이 결과적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싱가포르의 성공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싱가포르는 산업의 고도화를 이끄는 글로벌 기업에 과감한 세제 혜택(pioneer tax incentives)을 제공해 1인당 국민소득 6만달러의 경제 기적을 일궜다.

싱가포르의 실용주의 정책은 ‘이념을 따지지 말고 경제 성장에 전념하자’는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한 한국에 시사하는 바도 크다. 쥐(실리)를 잡을 기업을 키울 수만 있다면, 주주가 어떤 색깔이고 얼마를 챙겨가느냐 하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다.
무엇보다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 현실이 ‘우물 안 개구리’ 수준으로 지금 찬밥, 더운밥을 따질 때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쿠팡의 예상 기업가치는 ‘동남아 아마존’으로 불리는 싱가포르 씨(Sea Ltd.)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사업 무대를 동남아 전역으로 확장한 씨는 현재 뉴욕증권거래소에서 1000억달러(약 110조원)를 크게 웃도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국경 없는 덩치 싸움이 불가피한 산업에서 쿠팡의 상장은 홍남기 부총리의 표현처럼 ‘쾌거’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또 다른 관문일 뿐이다.

정작 쿠팡의 주주 구성보다 아쉬운 대목은 토종 대기업들의 상대적 부진이다. 자본력과 인재를 갖춘 롯데와 신세계그룹 등이 유통산업의 혁신을 이끄는 선구자로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 월마트와 까르푸에 맞서 유통 시스템 혁신을 이끌고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역동성을 느끼기 어렵다.더욱 뼈아픈 점은 혁신의 부재를 대기업만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운 국내 경영 환경이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대기업에 유독 많은 고용 비용을 치르도록 몰아세우고 있다. 의무휴업 등 각종 차별적 규제는 대기업 종사자들에게 ‘우리가 한다면 정치권에서 두고보지 않을 것’이란 식의 패배주의를 심어주고 있다. ‘싱가포르에선 가지지 못해 아쉬운 대기업 그룹을 역차별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한 현지 교수의 말이 따끔했던 이유다.

뜨거워지는 동남아 스타트업 M&A

동남아시아 대표 스타트업들의 덩치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5일 싱가포르 벤처캐피털(VC) 업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스타트업들인 고젝과 토코피디어 간 합병 논의가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다. 고젝은 기업가치가 약 100억달러에 달하는 승차공유 서비스 회사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업체인 토코피디어의 가치는 80억달러로 평가받는다.

두 회사의 합병 논의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그랩과 씨(Sea Ltd.)의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맞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인터넷 쇼핑몰 ‘쇼피(Shopee)’를 운영하는 씨는 올해 초 인도네시아 BKE 은행을 인수하며 금융사업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사인 씨의 시가총액은 최근 1년 새 다섯 배로 뛰어 1300억달러(약 150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쿠팡 기업가치의 세 배를 웃돈다. 2018년 우버의 동남아 사업을 인수한 그랩도 올 들어 창사 이래 최대인 20억달러 차입에 성공하며 추가 인수합병(M&A)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