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조삼모사' 불과한 "국민연금 매도금지" 청원

비중 안 낮추면 20년 후 '매도폭탄'
쌀 때 사고 비쌀 때 파는 게 기본

황정환 마켓인사이트부 기자 jung@hankyung.com
“국민연금이 국내주식 비중을 줄이지 못한다면 20년 뒤 매년 매도 폭탄이 터질 겁니다. 결국 ‘조삼모사’와 다름없습니다.”

한 대형 연기금 간부 A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요즘 신문 기사나 온라인 여론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고 토로했다. 연기금의 46거래일 연속 국내주식 순매도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국민연금 등은 “최근 순매도는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자산배분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일부 동학개미(개인투자자)들은 ‘국민연금이 주가 하락의 주범’이라며 청와대 청원, 국민연금 앞 집회를 불사하고 있다.여론이 들끓자 정치인, 동학개미의 ‘구루’로 통하는 일부 전문가들이 합세했다. 2025년까지 국내주식 비중을 전체의 15%(작년 말 기준 21.2%)로 낮춘다는 국민연금의 중기자산배분안을 변경해서라도 ‘팔자’ 주문을 멈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장)까지 나서서 “리밸런싱(자산배분)을 다시 검토하겠다”며 연금의 계획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런 주장에 따르는 것이 결국 ’조삼모사‘에 불과하다는 게 A씨 설명이다. 국민연금 기금은 2041년 1778조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차차 줄어들어 2057년 완전히 고갈될 예정이다. 20년 후엔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이 국민연금의 주 업무가 된다. 국민연금이 국내주식을 현재 중기자산배분 목표치인 15%로 유지할 경우, 약 20년 뒤부터 고갈 시점까지 해마다 17조원어치씩 팔아치워야 한다. 지금 주식 비중을 줄이지 않으면 언젠가 그 자산을 매도해 연금 가입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 시장에 미칠 충격은 국민연금 가입자 전체와 미래의 투자자가 떠안게 된다는 얘기다.

고갈 이후까지 지속가능한 투자 방식을 고려한다면 국내주식 비중은 1%도 많다는 것이 국민연금 내 전문가들의 일관된 분석이다. 비공개에 부쳐져 있지만 중기자산배분안 결정 과정에서 매년 이뤄지는 국민연금 내부 연구결과는 국내주식을 0%에 수렴할 정도로 낮추고 해외주식과 대체투자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미래의 일을 제쳐 놓더라도 지금이 주식을 더 살 때는 아니다. 코스피지수는 연기금의 매도가 본격화되기 전인 3개월 전보다 10.79% 올랐다. 같은 기간 미국 나스닥은 3.66%, S&P500은 3.86% 오르는 데 그쳤다. 중국·일본·유럽 증시에 비해서도 상승률이 높았다. 비쌀 땐 팔고 쌀 때 사는 것은 투자의 기본이다.

물론 국민연금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올해가 한국 증시의 ‘변곡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모험적 베팅으로 돈을 버는 헤지펀드가 아니다. 국민의 노후를 위해 최소한의 안정성을 지키며 운용하는 연기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