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32년 돌아왔지만 결국 또 '무죄'

대법, 기각했지만 "진실규명 작업 필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이 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현대사의 대표적 인권 유린 사례로 꼽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고인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은 1989년 무죄를 확정받았다. 당시 대법원은 형제복지원은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훈령 410호에 따라 부랑자를 수용했을 뿐이며 그 행위는 정당행위였다고 판단했다. 검찰의 부실·축소 수사 의혹도 끊이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박 전 원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30여년간 '무죄'로 묻혀있던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18년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이 '비상상고' 카드를 꺼내면서부터다. 비상상고란 이미 확정된 형사 판결에서 소송절차상 위법한 사항이 발견됐을 때 대법원에 다시 재판해달라고 요구하는 제도를 뜻한다. 형사소송법상 검찰총장만 신청할 수 있다. 동법 446조에 따라 비상상고를 할 이유가 있다고 인정되면 대법원은 원래 판결을 파기해야 한다. 다만 비상상고는 '재심'과 달라 그 효력이 피고인에게까지 미치지 못한다. 쉽게 말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기존 판결을 파기할 수는 있지만 그에 따라 박 전 원장의 혐의가 유죄로 바뀌지는 않는다. 대신 피해자들이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은 열리게 된다.

2018년 4월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정부 훈령 자체가 헌법에 어긋나므로 해당 훈령에 근거한 부랑인 수용은 불법감금에 해당한다며 검찰에 재조사를 권고했다.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도 같은해 9월 "위헌·위법인 내무부 훈령 410호를 적용해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등 원생들에 대한 특수감금 행위를 형법상 정당행위로 보고 무죄로 판단한 당시 판결은 형사소송법이 비상상고의 대상으로 규정한 '법령위반의 심판'에 해당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며 비상상고를 권고했다. 이에 같은해 11월 당시 문무일 총장은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신청했다.

1989년 무죄 판결 이후 32년만의 비상상고심 결과는 어땠을까? 32년 전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원심에 법령 위반이 없었기 때문에 '비상상고'를 할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취지에서다. 다만 이러한 결론과 별개로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은 헌법의 최고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 사건"이라고 못박았다.

11일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특수감금 혐의로 기소돼 무죄를 확정받은 박 전 원장의 비상상고심을 기각했다. 대법은 "이번 사건은 비상상고의 사유로 정한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을 위반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박씨가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내무부 훈령 때문이 아니라 법령에 의한 행위는 처벌하지 않도록 한 형법 20조이기 때문에 기존 무죄 판결이 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이어 대법은 "법령 위반의 의미와 범위에 관해서는 다른 비상상고 사건과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원칙을 벗어나면 확정 판결의 법적 안정성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저항하지 못하고 자기의 불행이 타인의 기분이나 감정에 맡겨진 삶을 살았다"며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 사건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진실규명 작업으로 피해자의 아픔이 치유돼 사회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이날 판결 직후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씨는 "당사자들의 억울함은 국가가 인정을 한 부분이 있고 앞으로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여러 일들이 필요하다"며 "대법원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과거사위원회가 철저하게 조사를 해서 풀라고 했다"고 말했다.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도 "기각은 됐지만 의미는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