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보다 13년 먼저 외세 맞닥뜨린 일본, 무엇이 달랐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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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조선과 다른 방식으로 개항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1866년에 프랑스 함대 3척이 영종도와 강화도를 거쳐 서울의 양화대교까지 정찰하고 청나라로 귀환했다. 다시 7척의 전함을 끌고 와 600명의 해병대를 상륙시켜 강화도를 파괴하고 약탈했다. 1871년에는 미국이 아시아 함대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대로 강화도를 공격해 군인과 백성들 300여 명이나 죽었다.
일본, 1854년 일·미 통상조약으로 개항
이데올로기 차이 바탕으로 서양문물 적극 수용
한편 일본은 1853년에 미국이 파견한 흑선(군함)의 포함외교에 경악했고, 1854년에는 오키나와와 유·미(琉·美) 수호조약을 맺고 온 미국과 ‘일·미 통상조약’을 맺고 개항을 선택했다. 의아하다. 불과 13년 앞서 선진 외세를 경험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켰고, 1910년에는 식민지로 만들어 아직도 분단의 비극이라는 멍에를 못 풀고 있다.일본은 무슨 일을 어떻게 벌여 이러한 성공을 거둔 것일까?
일본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과 분명히 달랐다. 첫째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종류와 성격이다. 전통신앙을 계승했고, 18세기 후반에는 국학을 발전시켜 신도사상과 천황제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효와 인, 근왕정신(충)을 중요시한 조선의 성리학과는 달리 천황과 주군에 충성하고, 의리와 명예를 준거가치로 삼았다. 불교는 ‘선(禪)’을 매개로 무사도와 결합했고, 백성들의 실생활과 밀접해져 주도적인 사회사상 역할을 했다. 비록 16세기 후반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부 지역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도 경시할 수 없다.
둘째, 외국, 특히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582년에 현재 오이타현 지역에서는 4명의 소년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고, 1613년에 센다이번이 파견한 유럽 사절단은 범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와 쿠바를 거친 다음에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니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로마까지 가면서 문물을 견학하고, 통상활동을 했다. 17세기 전반에 바쿠후(幕府·막부)는 수많은 주인선(무역선)을 동남 아시아까지 파견했고, 해외에 일본마을(町)을 건설했으며 태국에서는 하급 무사들이 아유타 왕국에서 발생한 쿠데타에 참여했다.
셋째, 난학(네덜란드)을 활용해 서양의 과학과 기술·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지도 제작술·조선술·항해술·무기·천문·의학·농법 등의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고, 학교를 세워 적극적으로 나라 발전에 활용했다. 섬나라 일본인들은 인식이 세계로 확장됐고, 신사상인 인본주의와 근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바쿠후 말기에 서양의 압박을 받자 애국심을 발휘하고, 정치와 사회개혁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훈련받은 것이다. 넷째, 쇄국정책을 표방했지만, 바쿠후는 현명하게 4개의 항구를 선택하여 개방했다. 홋카이도 남쪽의 마쓰마에는 아이누족, 사쓰마는 유구국, 대마도는 조선, 나가사키의 데지마는 청나라·네덜란드(유럽)와 교류하도록 허가했다. 특히 나가사키는 외국 상인들이 입항할 때 해외의 풍설(정보)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 항을 통해 막대한 양의 도자기를 수출해 유럽의 도자기 문화에 자극을 줬고, 주문생산까지 했을 정도였다. 전통 그림인 ‘우키요에(부세화)’는 1850년에 열린 런던 박람회에 출품한 후 인기를 끌어 모네, 고흐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번의 다이묘들도 만성적인 재정난 때문에 쇼군 몰래 여러 지역과 밀무역을 시도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의 쇄국과는 달리 간접무역을 계속하면서 세계로 열린 ‘반개방’ 국가였다.
다섯째, 경제가 발전하여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의 결과를 수용할 토대가 마련됐다. 농법과 농기구 등의 개량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고, 어업과 공업 등의 산업이 발달했다. 기술력의 발전으로 도로망·수운·해운이 발달해 전국적인 규모의 유통권을 만들었고, 상업이 발달했다. 각 번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운영 재정의 확충을 위해서 상업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도시가 발달해 1721년에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을 웃돌았고, 오사카나 교토도 40만 명을 상회했다. 자연스럽게 유연한 사고와 능력을 갖춘 대상인들을 주축으로 전통질서를 비판하면서 신사상과 신문화, 신체제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결국 일본의 성공적인 개항은 실학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실력을 갖춘 사회 흐름이 형성된 덕분이다.
의아하다. 조선 통신사들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됐는데, 한 번에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일본의 변신과 발전을 보면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오랑캐라는 편견과 패전국이었다는 반감 때문인지 성리학의 우월감과 개인의 문학적 능력을 자랑하는데 공력을 기울였다. 물론 조엄 등 일부는 꼼꼼히 상황을 기록하고, 귀국 후에는 문물을 도입할 것을 역설했지만 ‘북학’을 표방한 연행사 등과 달리 ‘남학’을 자처하지 못한 채로 조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무렵이 되면서 서양세력들은 동아시아 세계를 유럽의 무역망,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했다. 서양의 우세한 무력, 불평등한 조약, 질 높은 상품 등과 대응해서 방어와 역전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 뿐이었다. 1853년에 미국의 군함(흑선)이 에도에 가까운 우라가에 정박하고 포함외교를 개시했고, 1854년에는 요코하마에서 '일·미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1855년에는 러시아와 ‘일러 화친조약’을 맺었다. 사할린에 이미 진출한 러시아와는 1791년부터 지정학적으로 숙명적인 관계였다. 바쿠후는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해 1799년에 쿠릴열도를 ‘직할령’으로 지정했고, 1808년에는 마미야 린조를 사할린 지역에 파견했다. 그는 아무르강 하구까지 탐사해 오호츠크해와 북태평양 일부까지 포함된 지도를 만들었다. 김정호는 1861년에 이르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바쿠후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1854년에 네덜란드에 군함과 장비를 발주했고, 1855년 10월에는 교관단이 입국해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르쳤으며, 1857년 9월에 발주했던 군함이 드디어 도착했다(윤명철,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 이러한 상황에서 1858년 7월에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고,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연이어 조약을 맺었다. 이 ‘안세이 조약’은 천황의 허락없이 바쿠후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므로, 결국은 바쿠후 타도의 신호탄으로 비화했다.
그런데도 바쿠후는 1860년에 견미 사절단, 1862년에 견구(유럽) 사절단, 1863년에 견불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1863년 8월에는 사쓰마번이 영국과 3일 전쟁을 벌였고, 1864년에는 세또 내해의 입구를 방어하는 조슈번이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연합 함대와 전쟁을 벌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바쿠후는 계속해서 1866년에 유학생을 영국으로 파견했고, 견러 사절단도 파견했다. 물론 유력한 번의 다이묘들도 바쿠후 몰래 국비 유학생을 파견하면서 새 시대에 대비했다. 이렇게 일본은 조선과는 전혀 다른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양식을 보이면서 위기를 극복해갔다. 하지만 자체 모순으로 이미 분열 중이던 바쿠후는 외세의 침략을 방어할 능력이 부족했고,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이제 바쿠후와 천황가, 바쿠후 옹호파와 급진적인 존왕 양이파, 전략과 전술을 달리한 개혁 세력들 간에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으며, 주체는 혼슈의 조슈번과 남규슈의 사쓰마번에 소속된 하급무사들이었다. ‘하기(萩)’에 기반을 둔 요시다 쇼인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원조이며, 『유수록』 등을 통해서 일본의 팽창을 역설하면서 조선 등의 구체적인 지역과 전략까지 제시했다. 그가 쇼카 촌숙(松下村塾)에서 가르쳤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훗날 조선 침략의 주체들이 됐다(성희엽, 『조용한 혁명』). 1868년에 일본은 봉건 바쿠후제가 쓰러지면서 근대 천황제 국가로 변신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주체들은 부국강병에 주력하면서 주변국의 침략을 추진했고, 그 우선순위는 숙명적인 관계인 조선이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전개될 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악랄한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해 나라는 붕괴 직전이었고, 1860년에 신정권을 수립한 대원군은 개혁정치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1865년부터 빈약한 국고마저 거덜 낼 경복궁을 중수하는 사업에 돌입했다. 천주교가 가진 문명사적인 의미와 정치적인 역할을 모른 채 박해했으며, 1866년에 병인양요, 1871년에 신미양요를 겪은 후에도 승전이라고 백성들을 기만하면서 자기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가정해 본다. 만약 조선의 지식인들이 현실과 백성들을 생각하고, 개방을 개혁과 발전의 호기로 판단하면서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안 됐을까?그때와 유사한 상황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역사학자의 기우 속에서 미래를 위한 전략으로 조선의 개항과 붕괴과정을 솔직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