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워케이션 성지' 된 일본의 와이키키

"지역경제 되살린 시라하마의 변신
최고 수준 IT 인프라 각광
한국도 '포스트 코로나' 대비해야"

정영효 도쿄 특파원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한 장의 사진이 일본 직장인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새하얀 모래사장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노트북을 펴든 여성의 모습이다. 설정 사진 같지만 와카야마현 시라하마(白浜)의 실제 풍경이다.

시라하마는 ‘하얀 모래사장’이란 이름대로 샴페인 거품 같은 흰 모래밭으로 유명하다. 해변 주위를 개발하면서 모래가 유실되자 호주 퍼스로부터 20여 년간 20만t의 모래를 수입할 정도로 경관을 유지하는 데 공을 들였다.이 해변 어디서든 와이파이가 터진다. 해변뿐만이 아니다. 1500개 이상의 와이파이 스폿이 설치돼 마을 족욕탕과 공원 등 어디서나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다. 인구 1000명당 와이파이 스폿 수가 일본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두 번째로 많다.

자연스레 시라하마에는 ‘워케이션의 성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인 워케이션은 휴가지에 머물면서 일을 병행하는 근무형태를 말한다. 일본 정부는 도쿄 집중도를 완화하는 한편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기업들에 재택근무와 워케이션을 권장하고 있다.

시라하마가 사진 한 장 덕에 워케이션의 성지가 된 것은 아니다. 이 마을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7년부터 워케이션에 힘을 쏟았다. 첫 단추는 정보기술(IT)기업을 유치하는 것으로 끼웠다. 해변 전체에 와이파이를 깐 것도 IT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IT기업 직원들은 노트북 한 대만 연결하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데다 창의력과 혁신을 중시하기 때문에 워케이션과 잘 맞는다고 판단했다.

NEC와 미쓰비시지소 등 대기업이 시라하마에 워케이션 사무소를 열었다. 본사를 이곳으로 옮기는 IT기업도 속속 등장했다. 수년 전부터 워케이션 인프라를 완비한 시라하마에 코로나19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하와이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 ‘일본의 와이키키’로 불리는 시라하마는 연간 340만 명이 찾는 인기 관광지다. 그런데도 시라하마가 워케이션에 공을 들인 건 앉아서 손님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사정 때문이었다. 시라하마 주민들의 평균소득은 243만엔(약 2544만원)으로 1741개 기초자치단체 중 1535위다. 인구는 2만 명으로 20년 새 20% 이상 줄었다.간사이 지역이지만 기이반도의 최남단에 있어 오사카 등 주요 도시와는 산지로 가로막혀 있다. 이웃 오사카에서 오는 데도 차로 3시간이 걸린다. 도쿄 사람들은 오키나와나 홋카이도만큼 먼 지역으로 인식한다. 방문객의 74%가 간사이 사람들이고 그나마 85%는 당일치기로 왔다간다. 도쿄 등 간토지역에서 온 방문객은 5%밖에 안 된다. 8월 관광객이 1월의 1.7배로 여름 편중도 심하다. 유명 관광지라고 해도 지역 주민들이 누리는 혜택은 별로 없는 빛 좋은 개살구인 셈이다.

워케이션은 간사이만 바라봐야 했던 시라하마의 산업구조를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시라하마에서 차로 5분 거리에는 난키시라하마공항이 있다. 오사카에서는 차로 3시간이지만 도쿄 하네다 공항에선 1시간이면 올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구마노고도와 고야산, 일본 3대 폭포인 나치폭포, 일본 3대 고대온천 등 주변 관광지도 시라하마의 경쟁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부분이 이 시골마을에 공항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2년 전 민영화한 난키시라하마공항이 총대를 멨다. 지역 관광회사 역할을 맡아 다양한 워케이션 상품을 개발했다. 일본항공(JAL)이 하루 세 차례 도쿄의 직장인들을 시라하마로 실어나른다.2019년까지 월 300명을 넘지 않았던 워케이션 방문객 숫자가 작년 8월 2000여 명, 비수기인 11월에도 1500여 명으로 급증했다. 항공편 이용객 수가 3년 전보다 두 배로 늘었다. 일본 국내선 중 이런 성장세를 나타낸 곳은 없다.

호텔이 텅 비곤 했던 월요일과 목요일도 숙박객이 30% 늘었다. 오카다 신이치로 난키시라하마공항 대표는 “음식점과 상점가가 활기를 띠면서 셔터가 굳게 내려졌던 거리에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라고 전했다.

한국에도 제주도와 같이 뛰어난 입지를 가진 국제 워케이션 성지 후보들이 있다. 하지만 워케이션에 대한 관심은 낮은 편이다. 어떻게든 코로나19 확산을 막아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탓이라고 한다. 초기 방역의 성과에만 취한 나머지 코로나19 사태를 활용하고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는 전략은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워케이션 떠나는 직장인 잡아라

워케이션을 정식 근무형태로 인정하는 일본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워케이션을 떠나는 직장인을 겨냥한 관광상품도 속속 나오고 있다.

부동산 개발회사 모리트러스트는 일본항공(JAL)과 함께 오는 19일부터 워케이션 상품을 판매한다. 워케이션 목적지의 왕복 항공권과 모리트러스트가 워케이션 전용으로 운영하는 일본 전역의 8개 호텔, 주변 테마파크 입장권을 결합했다. 고객이 2~14일까지 자유롭게 일정을 짤 수 있다. 모리트러스트는 “개인용과 가족용 워케이션 상품을 다양하게 내놓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간 철도회사 게이힌급행전철은 이달부터 가나가와현 미우라반도에서 워케이션 및 공유오피스 사업을 시작했다.지방자치단체들도 낙후한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기회로 워케이션을 활용하고 있다. 홋카이도청은 동부 도카치 지역을 ‘제2의 워케이션 성지’로 띄우기 위해 관련 인프라를 개발하고 있다. 일본 4대 섬 가운데 가장 낙후한 지역인 시코쿠의 주요 현들도 워케이션을 떠나는 중장기 체류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홍보에 나서고 있다.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