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서울서 신입 안 뽑는다"는 글로벌 IB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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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 못 지키자 '주니어 포기'최근 미국 월가에서 골드만삭스 신입 직원들의 ‘반란’이 큰 화제가 됐다. 골드만삭스 1년차 직원 13명이 사내 과도한 노동 강도를 담은 보고서를 소셜미디어에 공개해서다.
사업장 따라 규제 탄력 적용해야
차준호 마켓인사이트부 기자 chacha@hankyung.com
보고서에서 드러난 투자은행(IB) 주니어들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은 처참하다. 응답자들은 지난 2월 근무 시간이 최장 주당 105시간, 평균 주당 98시간이었다고 밝혔다. 한 응답자는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상시적으로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새벽 5시에 퇴근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회사에 “주당 80시간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이 보고서를 보는 한국 IB들의 시선은 복잡하다. 이들의 근로시간은 국내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주당 52시간의 두 배다. 골드만삭스 본사가 아니라 서울사무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업주가 징역 2년 이하 형사 처벌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본사에서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IB 업무가 한국에서만 천천히 진행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기업의 인수합병(M&A), 채권의 발행, 기업공개(IPO) 등 IB 업무는 그 특성상 중요한 딜이 한참 진행 중일 때는 모두 시간에 쫓기게 마련이다. 글로벌 IB라면 낮에는 한국에서, 저녁엔 유럽에서, 밤에는 미국에서 오는 연락에 대응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적지 않은 한국 내 IB들은 두 가지 방법을 써서 이 문제에 대응한다. 하나는 주 52시간을 넘기고도 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방법이다. 야근 수당은 언감생심이다.다른 하나는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받는 주니어를 뽑지 않는 것이다. 업계에선 골드만삭스가 본사처럼 일을 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IB 신입을 뽑지 않는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물론 골드만삭스는 그런 정책은 없다고 부인했다.) 규제에서 자유로운 홍콩이나 일본에서 뽑거나 한국어가 되는 직원을 그리로 보내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IB들도 비슷하다. 5~6명의 인턴을 쓴 뒤에 모두 ‘정직원 전환 불가’를 통보한 곳도 있다. 규제 대상이 아닌 시니어 인력을 중심으로 운영하며 일감만 따오게 하고 주니어 키우기는 포기한 곳이 많다.
결과적으로 경직적인 주 52시간제와 현실 간의 괴리 때문에 IB 분야 근무를 희망하는 주니어들은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야근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다.
규제가 현실을 선도할 때도 있지만, 간극이 너무 벌어지면 현실의 근로자들에게 괴로운 선택을 강요하게 된다. 미국처럼 주니어들을 휴식도 없이 주당 100시간씩 일하게 하자는 게 아니다. 사업장에 맞는 적정한 근무 체제를 찾아갈 수 있도록 탄력적인 적용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