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치유한 다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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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아니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싱하이(星海)광장에서 바닷가를 바라다본다. 처음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던 광장에서의 바다 조망이 점점 애처로움으로 변하고 작은 파도소리는 슬픈 음악처럼 들린다. 눈을 감고 밀려들어 오는 침략자들의 악랄한 고성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본다. 침략자들이 상륙해 제멋대로 마구 뜯어 고쳐 버린 건물과 장소들이 그 본래의 이름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런 것이 역사의 아픔이던가. 광장 주변에서 다롄의 스카이라인을 매일 바꾸고 있는 최첨단 고층 빌딩과 고급아파트는 역사가 되어버린 과거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롄은 공원과 광장과 고층 빌딩이 잘 어울어진 북방의 홍콩이다.)
청나라 말기의 중국은 세계열강의 먹이와 같았다. 영국은 아편 전쟁에서 승리한 후 청나라의 국권을 유린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동북 지방으로 내려와 야금야금 그들의 국토 넓이를 늘이고 있었으며, 일본 또한 대륙 진출의 야심을 꿈꾸고 있었다. 프랑스나 독일 또한 러시아와 손잡고 라오닝 반도 끝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다롄으로 들어가 한 몫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롄은 열강의 야합으로, 열강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큰 고초를 겪었던 슬픈 옛날을 간직한 도시다. 그래서 도시의 이름도 ‘청니와’에서 ‘다리니’로, 다시 현재의 ‘다롄’ 으로 바뀌기를 반복했다. 원래 이름마저 지배하는 힘센 자의 입맛에 따라 바뀌기 일쑤였으니 이보다 큰 굴욕이 또 있을 까.
그러나 시간은 그 아픔을 역사라는 이름의 추억으로 만들었고, 지금의 다롄은 북방의 홍콩으로까지 불리며 그 아름다움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뽐내고 있다. 심지어 중국 부호들이 현직에서 은퇴하면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싶은 중국내 첫 번째 도시로 그 이름을 올린 적까지 있다. 2012년에 다롄을 찾은 관광객은 무려 5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발마사지와 함께 받은 부항요법의 시원함을 잊을 수 없어 출장으로 다녀온 이 도시를 세 번이나 개인적으로 다시 방문한 것을 보면 관광객 수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진스탄과 라오후탄은 이미 설명이 필요 없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명소가 되었다. 다롄시내를 구경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광장이다. 싱하이 광장 외에도 인민광장, 중산광장, 올림픽 광장, 우의 광장, 승리 광장 등 수많은 광장은 다롄의 ‘광장문화’를 만들어 낸다. 광장을 거닐고 광장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광장을 꾸미는 어찌 보면 독특한 다롄만의 생활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특히, 저녁 시간에 이목구비가 달라 다른 지역에서 온 소수민족이거나 외국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사람들이 한데 섞여 춤을 추는 모습은 아주 신선했고, 중국이 다민족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3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이 곳 다롄에서 한데 섞여 산다는 중국 친구의 말은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현재에서 뒤돌아보는 역사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현재의 아픔은 역사가 되기 전까지는 고통으로만 존재한다. 미담으로 존재하는 역사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고통의 무게를 삭이기가 너무 버거운 사람들에게 다롄 여행을 권한다. 다롄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으로 아픔을 치유한 도시다. 열강들의 침입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인정하는 인내를 배운 도시다. 과일과 관련된 다채로운 축제, 다양한 만큼 화려한 사람들의 패션, 광장에서 느끼는 소소한 재미, 그리고 낙조(落照)때 광장 너머로 느껴지는 한 때는 아팠지만 잘 치유된 역사의 미소가 진통제처럼 다가올 것이다.
청나라 말기의 중국은 세계열강의 먹이와 같았다. 영국은 아편 전쟁에서 승리한 후 청나라의 국권을 유린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동북 지방으로 내려와 야금야금 그들의 국토 넓이를 늘이고 있었으며, 일본 또한 대륙 진출의 야심을 꿈꾸고 있었다. 프랑스나 독일 또한 러시아와 손잡고 라오닝 반도 끝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다롄으로 들어가 한 몫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롄은 열강의 야합으로, 열강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큰 고초를 겪었던 슬픈 옛날을 간직한 도시다. 그래서 도시의 이름도 ‘청니와’에서 ‘다리니’로, 다시 현재의 ‘다롄’ 으로 바뀌기를 반복했다. 원래 이름마저 지배하는 힘센 자의 입맛에 따라 바뀌기 일쑤였으니 이보다 큰 굴욕이 또 있을 까.
그러나 시간은 그 아픔을 역사라는 이름의 추억으로 만들었고, 지금의 다롄은 북방의 홍콩으로까지 불리며 그 아름다움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뽐내고 있다. 심지어 중국 부호들이 현직에서 은퇴하면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싶은 중국내 첫 번째 도시로 그 이름을 올린 적까지 있다. 2012년에 다롄을 찾은 관광객은 무려 5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발마사지와 함께 받은 부항요법의 시원함을 잊을 수 없어 출장으로 다녀온 이 도시를 세 번이나 개인적으로 다시 방문한 것을 보면 관광객 수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진스탄과 라오후탄은 이미 설명이 필요 없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명소가 되었다. 다롄시내를 구경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광장이다. 싱하이 광장 외에도 인민광장, 중산광장, 올림픽 광장, 우의 광장, 승리 광장 등 수많은 광장은 다롄의 ‘광장문화’를 만들어 낸다. 광장을 거닐고 광장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광장을 꾸미는 어찌 보면 독특한 다롄만의 생활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특히, 저녁 시간에 이목구비가 달라 다른 지역에서 온 소수민족이거나 외국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사람들이 한데 섞여 춤을 추는 모습은 아주 신선했고, 중국이 다민족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3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이 곳 다롄에서 한데 섞여 산다는 중국 친구의 말은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현재에서 뒤돌아보는 역사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현재의 아픔은 역사가 되기 전까지는 고통으로만 존재한다. 미담으로 존재하는 역사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고통의 무게를 삭이기가 너무 버거운 사람들에게 다롄 여행을 권한다. 다롄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으로 아픔을 치유한 도시다. 열강들의 침입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인정하는 인내를 배운 도시다. 과일과 관련된 다채로운 축제, 다양한 만큼 화려한 사람들의 패션, 광장에서 느끼는 소소한 재미, 그리고 낙조(落照)때 광장 너머로 느껴지는 한 때는 아팠지만 잘 치유된 역사의 미소가 진통제처럼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