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엔론의 추억


2001년 12월 2일. 엔론이 파산한지도 이제 4년이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의 언론매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 엔론이 회계부정을 넘어서 기업부정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것 같다. 최근 두산, 터보테크, 로커스 등의 대규모 회계부정 사건을 바라보면서 기업가정신에 대한 인지와 공감대가 취약한 우리의 기업환경에서는 엔론사태는 늘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파산결정이 보도되기 몇 달 전만 해도 엔론은 포천이 선정하는 500대 기업에서 7위를 차지했으며, 혁신과 경영진 자질 분야에서 4년 연속 1위에 오른 그룹이었다.




엔론의 2001년 1/4분기 실적은 전년 대비 주당 순이익 18% 증가, 분기별 총수익 281% 증가(500억달러), 순수익 20% 증가(4억달러) 등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2001년 회계년도의 수익목표를 주당 1.70달러에서 1.80달러로 올려 잡았다. 엔론의 미래는 온통 장밋빛이었고, 종업원과 언론들은 엔론의 경영진이 내놓는 달콤한 말에 각종 특혜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엔론의 수익은 정상적인 거래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었다. 엔론의 경영진은 법망을 피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부정을 저질렀다. 엔론은 우선 특수관계를 가진 합자회사를 하나 만들었다. 이 회사는 외부투자자가 3% 이상의 지분을 갖는 회사, 즉 엔론과 연결재무제표를 만들 필요가 없는 회사이다. 외부투자자의 자본이 3%가 넘으면 자회사가 아니라는 회계기준을 악용한 것이다.


그리고 합자회사 명의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뒤 엔론의 자산을 합자회사에 파는 척하면서 대출금을 엔론으로 끌어들였다. 엔론이 받은 돈은 수익으로 기록되고 부채는 합자회사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엔론은 이런 회사를 무수히 만들어 막대한 돈을 끌어들였고, 단기간에 재무상태가 양호하고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회사로 탈바꿈 했다. 이 같은 거래 과정에서 엔론의 최고재무책임자 엔디 패스토는 3,000만 달러의 커미션을 합법적으로 챙겼고 그 외의 경영진 역시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을 팔아 수백만 달러씩 이득을 봤다.




회계감사기관인 아더 앤더슨도 직원 수백명을 파견해 회계부정을 도왔다. 엔론이 아더 앤더슨을 장악하는 일은 아주 쉬웠다. 엔론은 위장된 장부를 수년간 열심히 조사하던 엔론 내부의 회계 감사원들을 쫓아내고 대학을 갓 졸업한 아더 앤더슨의 신입 회계사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엔론의 회계를 감시한 아더 앤더슨은 정상가격보다 몇 배 높은 수수료를 챙겼다.


하지만 엔론의 외줄타기 놀음은 9·11테러 이후 주가가 폭락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다. 엔론은 결국 2001년 10월 16일 3/4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비반복적 손실’ 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10억 1000만 달러의 부채를 밝힐 수 밖에 없었고, 두 달 뒤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아더 앤더슨도 기업과 회계법인 간의 밀착과 자체의 부실회계가 드러나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




2001년 엔론의 파산신청은 ‘폼페이 최후’로 언론에 묘사됐다. 회계분식은 물론 고위직에 있는 구성원들의 도덕적, 금전적, 성적 타락은 바로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폼페이에 비유될 정도였다. 이 사건은 미국 신경제 거품의 실체와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엔론사태가 9·11 테러보다 미국경제에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 7월 월드컴 회계부정과 관련해 전 회장 겸 CEO인 버나드 에버스(63)에 대해서 징역 25년형이 선고됐다. 엔론 관련기업인 다이너지사의 재무책임자 재미 올리스에게 선고된 24년 징역형을 웃도는 이 형량은 미국 기업비리와 관련한 사건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으로 그의 나이와 심장병 등 건강상태를 감안하면 사실상 종신형이나 마찬가지이다.




미국 통신업계 성공신화를 써내던 에버스는 3년전 110억 달러의 회계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면서 몰락했다. 기업은 파산했고, 10억 달러를 웃돌았던 집과 개인 재산은 모두 처분돼 투자자들의 집단소송을 무마하는데 쓰였다. 환갑을 넘긴 그에게 이제 남겨진 것은 고향 근처의 연방 교도소에서 치러야할 죄값 뿐이다.




미국법원이 회계부정사건에 연루된 기업인들에게 잇따라 중형을 선고하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우리나라와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최근 우리 기업의 잇따른 회계부정 사건을 바라보면서 법적제도의 보완, 윤리 재무장 운동 같은 기존의 대책도 의미가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바로 최고경영자 자체에 대한 부분이다. CEO는 전쟁과 같은 경쟁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어 있으며, 경쟁상대와의 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지낸다.




CEO는 철인이 아니다. 그래서 일과 삶의 조화(Work and Life Balance)가 매우 중요하다. 국내 재벌그룹 총수 중 많은 분들의 사망원인은 암으로 피로와 스트레스의 지속적인 노출과 누적이 발병의 요인이었다는 분석을 본 적이 있다. 피곤과 스트레스 속에서 진정한 창의와 혁신이 가능 한지 의문이다.




어제 경제신문을 보니 은행주가 급등하면서 시중은행 CEO들이 10억~80억 상당의 스톡옵션 평가차액으로 돈방석이 앉았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우리 같은 범인은 10억 정도면 평생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을 텐데, 많은 CEO들이 이미 그 이상을 소유하면서도 더 큰 탐욕과 소유욕 때문에 범죄자까지 되는 행태에 대해서 큰 의문이 든다.


이제 CEO도 자신이 원하는 삶과 행복에 대해서 진솔하게 표현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용인이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경영의 위험관리(Risk Management)를 위해서라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이 필요하며, 그것이 한국판 ‘엔론의 추억’으로 거듭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처방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