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얻는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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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 교회에서는 예배후 늘 탁구시합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무리에 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탁구실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치자면 18급 정도가 현재 나의 탁구실력이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본기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하교후 열심히 탁구장에서 실력을 연마했으니 실력이 좋은 건 당연했다. 당시 탁구실력이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한 몫을 했던 상황이라, 성인이 돼서도 당시 탁구로 인한 아픔이 가슴에 아려 온다.
그 사건은 기본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몸으로 체득한 계기가 되었다. 운동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방향을 책으로 돌렸다.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원하는 책은 반드시 사 주셨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삼국지를 하루에 3권씩이나 보기도 했다. 제갈공명의 병법술이 너무 멋졌다. 나도 커서 유명한 병법가가 되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생애 최초로 나의 의지에 의해서 책을 구입하게 됐으니 그 책이 바로 ‘손자병법’ 이었다. 오자병법은 덤으로 부록에 담겼다.
대학은 마치 물 만난 고기와 같은 즐거운 시기였다. 그 넓은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공짜로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보고 싶은 소설, 시 등을 볼 때마다 영혼의 오르가즘을 느꼈다. 아예 대학시절의 목표를 도서관 완전정복으로 삼았다. 1학년 때에는 하루에 3권씩 책을 보았다. 하루에 개인당 3권 밖에 대출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공부를 잘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학교에 오면 도서관으로 직행하곤 했다. 졸업 즈음에는 몇 번째 서가 몇 번째 칸에 무슨 책이 있는지 알 정도로 책에 대해서는 도통한 경지가 되었다. 급우들이 책을 찾으러 사서보다 나를 더 찾았던 시절이다. 물론 친절하게 잘 알려 주었다.
직장에 출근하고 나서 첫 월급을 받고 너무 기뻤다. 1990년 당시 매월 10만원을 책값으로 지출했다. 내 책꽂이에 책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을 보고 또 다시 영혼의 오르가즘을 느꼈다. 직장생활도 잘 한 편이었다. 아직도 첫 직장에 내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김용옥 선생이 어느 책에서 이런 투의 말씀을 하셨다. “무슨 문제가 있어 해결하려고 생각하면, 내 두뇌에서 자동으로 알아서 잘 정리해서 초고속으로 해답을 주더라.” 나는 직장생활에서 이런 빙의현상을 많이 경험했다. 이것을 ‘창의력의 입체성’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기본기의 중요성을 어린 나이에 깨달은 나는 당연히 ‘컨텍스트’ 보다는 ‘텍스트’에 치중했다. 사서(四書)는 기본이고 동서양의 철학,종교,사상서 그리고 노자 도덕경은 얼마나 보았는지 모른다. 국문학과 친구가 오히려 문학에 대해서 자문을 구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남들보다 좀 더 창의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은 모두 문학이라는 스승의 덕이다. ‘입체적 창의’의 희열은 느끼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거의 열락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창의적인 사람이 직장에서 당연히 남들보다 성과도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이치를 알고 깨닫는 것이다. 조급하지 말지어다.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 길을 걷다보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지치고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열심히 가다보면 ‘반드시’ 정상에 오른다. 이 당연한 성공의 이치를 간과하고 조급과 욕심이 앞서 신기루를 쫓아다니는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서 하는 이야기다.
그 사건은 기본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몸으로 체득한 계기가 되었다. 운동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방향을 책으로 돌렸다.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원하는 책은 반드시 사 주셨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삼국지를 하루에 3권씩이나 보기도 했다. 제갈공명의 병법술이 너무 멋졌다. 나도 커서 유명한 병법가가 되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생애 최초로 나의 의지에 의해서 책을 구입하게 됐으니 그 책이 바로 ‘손자병법’ 이었다. 오자병법은 덤으로 부록에 담겼다.
대학은 마치 물 만난 고기와 같은 즐거운 시기였다. 그 넓은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공짜로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보고 싶은 소설, 시 등을 볼 때마다 영혼의 오르가즘을 느꼈다. 아예 대학시절의 목표를 도서관 완전정복으로 삼았다. 1학년 때에는 하루에 3권씩 책을 보았다. 하루에 개인당 3권 밖에 대출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공부를 잘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학교에 오면 도서관으로 직행하곤 했다. 졸업 즈음에는 몇 번째 서가 몇 번째 칸에 무슨 책이 있는지 알 정도로 책에 대해서는 도통한 경지가 되었다. 급우들이 책을 찾으러 사서보다 나를 더 찾았던 시절이다. 물론 친절하게 잘 알려 주었다.
직장에 출근하고 나서 첫 월급을 받고 너무 기뻤다. 1990년 당시 매월 10만원을 책값으로 지출했다. 내 책꽂이에 책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을 보고 또 다시 영혼의 오르가즘을 느꼈다. 직장생활도 잘 한 편이었다. 아직도 첫 직장에 내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김용옥 선생이 어느 책에서 이런 투의 말씀을 하셨다. “무슨 문제가 있어 해결하려고 생각하면, 내 두뇌에서 자동으로 알아서 잘 정리해서 초고속으로 해답을 주더라.” 나는 직장생활에서 이런 빙의현상을 많이 경험했다. 이것을 ‘창의력의 입체성’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기본기의 중요성을 어린 나이에 깨달은 나는 당연히 ‘컨텍스트’ 보다는 ‘텍스트’에 치중했다. 사서(四書)는 기본이고 동서양의 철학,종교,사상서 그리고 노자 도덕경은 얼마나 보았는지 모른다. 국문학과 친구가 오히려 문학에 대해서 자문을 구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남들보다 좀 더 창의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은 모두 문학이라는 스승의 덕이다. ‘입체적 창의’의 희열은 느끼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거의 열락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창의적인 사람이 직장에서 당연히 남들보다 성과도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이치를 알고 깨닫는 것이다. 조급하지 말지어다.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 길을 걷다보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지치고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열심히 가다보면 ‘반드시’ 정상에 오른다. 이 당연한 성공의 이치를 간과하고 조급과 욕심이 앞서 신기루를 쫓아다니는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서 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