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당신, CEO

사장님,


당신은 정말 부러운 존재입니다. 우리 몇 안 되는 직원들에게 있어 사장님은 정말 위대한 인물입니다.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시고, 현지의 세계 유수기업에서 약관의 나이에 임원을 지내시면서 멋진 젊음을 살아 오셨다는데 대해 어느 누구도 부정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런 화려한 경력과 탁월한 실력을 갖추신 당신, 사장님께서 최근 서울에 오신 후, 어려움을 겪고 계신 걸 보면서, 우리들의 속쓰림은 차치하고라도, 사장님의 하루 하루가 너무 힘들어 보여 안타까운 마음에 이 글을 드립니다.




사장님께서 손수 작은 회사를 설립하시면서 우리 직원 30명을 모아, 속초 호텔로 데려 가셔서 창업 선포식을 하실 때 우리들의 꿈은 정말 컸습니다. 뭔가 큰 일을 저질러 주실 줄로 믿고 무한한 미래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평소 들어 보지 못한 언어로 만들어진 인사말씀에 귀를 솔깃하면서, 더 이상 꾸밀 수 없는 파워포인트의 애니메이션으로 작성된 사업설명서를 보면서, 정말 우리는 황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울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 되어 떨어지지 않으며, 뒤돌아 나가는 퇴근길엔 소주한잔 없이는 지하철을 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왜 그러느냐구요? 그건 사장님이 더 잘 아실 걸로 생각되어 일일이 말씀 드리기 어렵지만, 이 자리를 빌어 몇 가지만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사장님, 당신은 모든 언어를 당신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고객을 만나도 당신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어 찾아 온 손님 앞에서 당신은, 당신이 살아 온 “화려한 시절”만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신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라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뭔가 대안(代案)을 찾으려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며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 앞에서 당신 자랑만 늘어 놓더군요. 몇 번 눈치를 주고 말리려 해도 당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설명해 준다는 내용 역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수준의 언어가 아니라, 당신 혼자만 알고 있는 단어의 조합과 나열이었습니다.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쳐 주신 사장님께서, 정작 고객 앞에서는 당신의 용어로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고 계셨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잘 하신다고 우리에게 늘 이야기 하시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 온 손님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돌아 가는 게 누구의 책임이며, 혼자 말 잘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둘째, 사장님은 웃음이 없으십니다. 여직원 앞에서 억지로 웃으시는 거짓은 지나 가던 아줌마도 알아 차립니다. 평소 직원들에게 따뜻한 말씀 한 마디 건네지 않으시는 사장님께서, 우리들에게 감성경영을 이야기 하십니다. 하물며, 어느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에 가셔서 두어 시간씩 감성리더에 대해 강의를 하신다니 그 강의를 꼭 한 번 들어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억지로 웃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장님께서 우리들에게 뭐가 아쉬워 억지 웃음을 지으십니까? 차라리 웃지 마시고, 냉담하게 앉아만 계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사장님의 평소 말씀과 행동의 수준에서, 사장님이 얼마나 깊이가 얕고 넓이가 좁은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류 대학을 졸업하시고 일류 기업에서 오랫동안 몸 담으셨지만, 날아 오는 결재판을 맞으며 숫자를 확인한 적이 없으시고, 고객 앞에 무릎 꿇고 술잔을 따른 경험 없으시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럴 필요가 반드시 있었던 건 아니지만, 설날이나 추석 명절에 빈 손으로 거래처를 방문해야 하는 풍습을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다르게 생각해야 하는 게 슬프다는 겁니다.






셋째, 사장님은 지금 손을 털고 일어 나셔도 아무 문제가 없으신 분입니다. 자녀들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출가할 만큼 성장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장님도 겪을 만큼 세상일을 겪으셨고, 어느 정도 기반도 닦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린 다릅니다.




이제 겨우 30대에 접어 든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의 우리 직원들은 석 달 전 사장님의 부름에 응하여 전직을 포기했으며, 다시 전직과 같은 회사를 들어 가려면 또 몇 차례의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시험을 봐야 하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 번 회사 옮기는 게 얼마나 힘든 세상인데, 한 번 좋은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망설이고 얼마나 고민을 하는 건데, 쉽사리 계획만 그럴 듯 하게 만들어 오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장님께서 우리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사업을 하려면 얼마나 다양한 인맥과 수완이 필요한 지에 대해 사장님의 연구와 검토는 미흡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작금의 상황에 이르러 더 이상 사장님께 기대하거나 별도로 원하는 건 없습니다. 행여 사업을 접게 되시더라도, 우리를 그냥 몰라라 하지 마시고, 아시는 분들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소개 시켜 주셔서 새로운 일터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몇 푼 남지 않은 자금이겠지만 더 까 먹고 바닥이 나기 전에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는 씨앗(Seed Money)이라도 만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억지로 욕심 내지 마시고, 김 본부장이 제안하는 방안을 받아 들여 주셔서, 우리들의 생각이 엮어질 수 있도록 귀담아 들어 주시기를 앙청합니다.


그래도 사장님, 당신은 배운 게 있고, 식견이 올바른 분이므로, 최후의 순간까지 나쁜 어른으로 기억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역사 불편하게 만들지 마시고, 다 알만한 비리 확대하지 마시고, 깨끗한 끝을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