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의 사자성어 密雲不雨,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릴 시원한 빗줄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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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신문사에서 2006년 한국사회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고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는 ‘密雲不雨’를 선정했다. 교수신문에 의하면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교수신문 필진과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교수 2백8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2006년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풀이할 수 있는 사자성어로 ‘密雲不雨’(48.6%)를 꼽았다고 한다. 작년에 같은 곳 주관으로 교수들이 뽑은 2005년의 한자성어는 상화하택(上火下澤)이었다. 이 역시 상괘가 불의 상을 가진 離卦와 하괘가 연못의 상을 가진 兌卦로 이뤄진 睽卦의 상을 뜻하는 주역에서 나온 성어였다.
2년 연속 주역이란 경전속에서 나온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성어가 꼽힌 것은 주역을 전공한다는 필자로서도 다소 의외랄까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우리나라의 지성인들에게 밀운불우나 상화하택이란 한자성어의 뜻을 물어본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알까? 굳이 이런 궁벽진 단어가 제대로 한 해의 상황을 반영할 수 있는 대표성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본의는 알지못한채, 자칫 피상적인 문자의 뜻만 가지고 이해되고 선택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들 성어의 의미를 나름대로나마 다시한번 음미해보았다.
전년도의 상화하택이란 일단 경향이 다른 두 기운이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규괘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다. 다르다는 것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모순대립하는 이분법이나 이원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또한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는(和而不同) 사람이 군자’라고 했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면 상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연장이 아니므로, 서로는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정하지 못하면 다른 것이 아니며,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분법을 넘어서서 대화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기회이자 과정을 뜻한다.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는한, 일방에 대한 일방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도, 아직 이항대립의 구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진정한 다름은 자아의 정체성만을 고집하는 한 성립되지 못한다. 상대와의 비교와 대결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소멸하는 과정이다. 다름이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요구하며 결국 끝없이 타자의 입장에 서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화하택, 즉 ‘서로 다름’의 한단계 전진된 의미이다. 주역의 단전에서는 “불이 움직여서 타오르고 못이 움직여서 흘러내리며 두 딸이 한 곳에 거하나 그 뜻이 같이 행하지 아니하니라… 하늘과 땅이 어긋나도 그 일이 한가지며 남자와 여자가 어긋나도 그 뜻이 통하며 만물이 서로 어긋나있는 것 같아도 결국 같은 일을 이루나니 규괘의 때의 쓰임이 크도다!” 라고 이 규괘의 숨은 도리를 이미 갈파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2005년의 한해는 다름의 분열된 현상만 있었지 진정한 다름의 경지를 실현하지 못했다.
교수신문의 뜻은 아마도 이런 분열의 연장선상에서 2006년 한 해가 밀운불우로 저물고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교수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뜻을 풀이하고 있다 “밀운불우는 周易 小畜卦의 卦辭에 나오는 말로서, 여건은 조성되었으나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 정확하게 이해한 풀이이다. 그러나 한가지 더 사족을 붙이자면 밀운불우는 서쪽에서부터 새로운 혁명의 기운이 축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국 북경의 교외에 나가면 密雲水庫가 있다. 이는 북경에 수돗물을 공급해주는 댐의 이름으로, 3백리에 이르는 수도관을 통해서 대도시에 마실 물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댐중의 하나이다. 이 댐의 이름도 참 공교롭다. 구름은 비가 되어 내려서 지상의 물이 된다. 그 물을 담아두는 곳의 이름이 밀운(빽빽한 구름)이니 溫水里에 온천이 생기고 飛來里에 비행장이 생긴 것처럼, 참 교묘하게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 밀운이란 이름은 근자에 댐을 지으면서 부친 호칭이 아니다. 중국에서 나온 지명사전을 찾아보면 後魏때에 밀운현을 두었다가 북제때에 폐했고, 다시 당나라때에 밀운군을 두었으나 원나라때에 폐했다가, 명나라때에 밀운현으로 다시 개명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봉천 개원현 서남쪽에 또 하나의 밀운이 있는데, 요나라때에 설치했다가 곧 慶雲으로 개명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왜 이렇게 밀운현의 이름은 고쳐졌다가 복권되었다가를 반복했을까? 아마도 정권을 가진 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미묘한 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밀운이란 이름은 현재의 세상에 대한 답답함을 표현한 말이고, 푹푹찌는 무더위가 시원한 스콜을 불러들이듯 곧이어 답답한 이 세상에 비가 퍼부울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이 세상 대한 부정과 함께 지금은 그렇지만 곧이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혁명의 기운이 퍼부어내릴 것이란 예측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올해가 밀운불우의 해였을까?
2년 연속 주역이란 경전속에서 나온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성어가 꼽힌 것은 주역을 전공한다는 필자로서도 다소 의외랄까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우리나라의 지성인들에게 밀운불우나 상화하택이란 한자성어의 뜻을 물어본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알까? 굳이 이런 궁벽진 단어가 제대로 한 해의 상황을 반영할 수 있는 대표성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본의는 알지못한채, 자칫 피상적인 문자의 뜻만 가지고 이해되고 선택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들 성어의 의미를 나름대로나마 다시한번 음미해보았다.
전년도의 상화하택이란 일단 경향이 다른 두 기운이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규괘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다. 다르다는 것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모순대립하는 이분법이나 이원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또한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는(和而不同) 사람이 군자’라고 했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면 상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연장이 아니므로, 서로는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정하지 못하면 다른 것이 아니며,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분법을 넘어서서 대화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기회이자 과정을 뜻한다.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는한, 일방에 대한 일방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도, 아직 이항대립의 구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진정한 다름은 자아의 정체성만을 고집하는 한 성립되지 못한다. 상대와의 비교와 대결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소멸하는 과정이다. 다름이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요구하며 결국 끝없이 타자의 입장에 서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화하택, 즉 ‘서로 다름’의 한단계 전진된 의미이다. 주역의 단전에서는 “불이 움직여서 타오르고 못이 움직여서 흘러내리며 두 딸이 한 곳에 거하나 그 뜻이 같이 행하지 아니하니라… 하늘과 땅이 어긋나도 그 일이 한가지며 남자와 여자가 어긋나도 그 뜻이 통하며 만물이 서로 어긋나있는 것 같아도 결국 같은 일을 이루나니 규괘의 때의 쓰임이 크도다!” 라고 이 규괘의 숨은 도리를 이미 갈파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2005년의 한해는 다름의 분열된 현상만 있었지 진정한 다름의 경지를 실현하지 못했다.
교수신문의 뜻은 아마도 이런 분열의 연장선상에서 2006년 한 해가 밀운불우로 저물고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교수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뜻을 풀이하고 있다 “밀운불우는 周易 小畜卦의 卦辭에 나오는 말로서, 여건은 조성되었으나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 정확하게 이해한 풀이이다. 그러나 한가지 더 사족을 붙이자면 밀운불우는 서쪽에서부터 새로운 혁명의 기운이 축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국 북경의 교외에 나가면 密雲水庫가 있다. 이는 북경에 수돗물을 공급해주는 댐의 이름으로, 3백리에 이르는 수도관을 통해서 대도시에 마실 물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댐중의 하나이다. 이 댐의 이름도 참 공교롭다. 구름은 비가 되어 내려서 지상의 물이 된다. 그 물을 담아두는 곳의 이름이 밀운(빽빽한 구름)이니 溫水里에 온천이 생기고 飛來里에 비행장이 생긴 것처럼, 참 교묘하게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 밀운이란 이름은 근자에 댐을 지으면서 부친 호칭이 아니다. 중국에서 나온 지명사전을 찾아보면 後魏때에 밀운현을 두었다가 북제때에 폐했고, 다시 당나라때에 밀운군을 두었으나 원나라때에 폐했다가, 명나라때에 밀운현으로 다시 개명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봉천 개원현 서남쪽에 또 하나의 밀운이 있는데, 요나라때에 설치했다가 곧 慶雲으로 개명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왜 이렇게 밀운현의 이름은 고쳐졌다가 복권되었다가를 반복했을까? 아마도 정권을 가진 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미묘한 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밀운이란 이름은 현재의 세상에 대한 답답함을 표현한 말이고, 푹푹찌는 무더위가 시원한 스콜을 불러들이듯 곧이어 답답한 이 세상에 비가 퍼부울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이 세상 대한 부정과 함께 지금은 그렇지만 곧이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혁명의 기운이 퍼부어내릴 것이란 예측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올해가 밀운불우의 해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