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세월호 참사)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4년 그날 나는 사무실 문도 걸어 잠그고 3일 밤낮을 슬픔에 잠겨 울고 또 울었다. 내재되어 있던 우울감이 올라와 그 슬픔은 나를 패닉 상태에 빠뜨렸고 그렇게 그냥 있었다. 하늘도 울었고 땅도 울었고 사람도 울었다. 욕심 없는 자만 그랬다. 오늘이 또 그렇게 그날이다. 자식은 죽어 부모의 가슴에 묻힌다고 했다. 자식이 죽던 그날 그렇게 함께 죽었다. 그들은. 그들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날 그 슬픔을 거기에 그렇게 둔 채 아직 거두지 못했다. 왜? 왜 그럴까? 혹자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한다. 지겹다. 그만 하면 됐다. 그래서 뭐가 바뀌었냐? 받을 것이 더 있느냐? 심지어는 여행가다가 죽었는데 뭐가 그리 서러우냐? 반문한다. 또 다른 혹자는 자기 자식이 탈 배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런 배에 실어 보낸 부모들이 자식을 죽였다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자식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죽었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고 아직도 그 바다에 9구의 시신이 그냥 그렇게 배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히 사람이 더구나 아이들이 죽은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 그것도 한꺼번에 수백 명이 죽었다는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도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날 짐승 들짐승 바다의 물고기도 울고 또 울 엄청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분(公憤)하는 이유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정치권들, 기득권들,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에 의해 힘없고 아무런 잘못 없는 어린 아이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에 있다. 최선을 다했지만 희생이 있었다면 공분하지 않는다. 그저 슬픔으로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아이들이 또 동승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공분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힘의 논리는 있어 왔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힘의 논리는 유효하게 작용한다. 그것이 질서를 만들고 그것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 준다. 힘을 갖기 위해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 충실히 살고 좀 더 행복해 지기 위해 재화를 모은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욕망이고 욕구이며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을 해(害) 하거나 결과를 초래한다면 당장 멈추어야 한다. 그렇게 그런 문제로 아이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고 했다. 생명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죽었고 그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가해자들은 아직도 살아 있고 여전히 잘 살고 있다. 불경에 부모는 자기 목숨이 있는 동안은 자식의 몸을 대신하기 바라고 죽은 뒤에는 자식의 몸을 지키기 바란다는 말이 있다. 그런 부모가 자식을 잃었다. 그것도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아닌 인재로. 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거부(Disavowal,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부인은 충격과 외상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의 지각을 부정하는 특수한 방어형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원인이 밝혀져 있고 더 밝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다는 것에 공분한다. 그러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위정자들의 방관(傍觀)에 공분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밖에 처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안위(安慰)를 위한 것이라는 데에 분노하는 것이다. 공직자는 국민의 혈세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한다. 국민이 혈세를 지불할 때는 똑똑하고 지식이 풍부하고 아울러 자신을 평안히 살게 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위(職位)도 주었고 권력(權力)도 주었다. 그런 자들이 자신에게 밥을 주는 국민의 아픔과 고통을 보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직무(職務)태만(怠慢)이며 거래 위반이다. 그런 자들은 위정자(爲政者)로서 그 위치에 있을 수 없고 있으면 안 된다. 정치가(政治家)는 부정(不正)을 바로 잡아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려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오직 그들이 거기 있는 이유는 그것이 전부다. 시민과 국가, 평등과 자유, 법과 정의 등의 본질과 필요성, 정부의 합법성의 근원, 정치와 윤리와의 관계, 전쟁과 평화, 정치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관한 학문이며, 정치학의 한 분과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논의되는 분야로서의 정치철학(政治哲學)은 그 대상이 국민이고 근본이 민의(民意)이며 국민의 행복이 그 목적이며 전부다. 국민에 있어 약자도 강자도 구분 될 수 없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구분될 수 없고 되고 안 되고 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설령 위정자들을 위협하는 악(惡)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수의 국민이 원한다면 시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위정자들이다. 위정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의 일꾼이라는 자신들의 말이 실현되려면 그래야 옳다. 그런데 언제나 국민은 헛꿈을 꾼다. 언제나 국민은 약자로 변함없이 힘들고 아프고 괴롭다. 그래서 더욱 국민은 아니 마음이 아픈 국민은 4.16을 잊을 수 없다. 위정자라면 가진 자라면 힘 있는 자라면 4.16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 고민을 구체화 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그것이 위정자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차대한 일이고 그들의 몫이다. 설령 자기 자리를 내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서 자신이 불명예 퇴직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이런 말조차 그저 희망사항일 것이다. 누가 자신을 희생해서 대의를 달성하겠는가! 정의는 죽었고 의사(義士)는 없다. 지금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오늘이 더 슬프다. 팽목항은 오늘도 비가 내린다. 안산에도 광화문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