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호의 영화로 보는 삶] 슬픔의 심로 겨울 나그네!

<프롤로그>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인 문예영화 전성기 시절, 작가 이문열과 최인호는 소설과 영화에서 많은 대중 친화적인 재미와 서정적 사유의 시간을 주기도 했다. 청춘에게 사랑은 삶의 원천이요 긴 인생을 살아가는 에너지이다. 최인호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겨울 나그네>에서 주인공은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의 사랑을 잃자 자신의 삶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을 보고 젊은 날의 타협 없는 열정과 순수함에 공감하게 된다. 긴 인생을 살아보고 관조하는 시점에서는 한낱 가슴 떨리는 젊은 날의 추억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촛불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것과 같은 인간 심연의 순수한 감정이기에 사랑을 잃고 눈길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의 쓸쓸한 모습에 가슴이 시려온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빌헬름 뮐러의 원작 시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집 아가씨’에 곡을 붙인 것을 시작으로 총 24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연가곡이다.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추운 겨울,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들판으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추운 들판을 헤매는 청년의 마음은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어느덧 까마귀, 숙소(무덤), 환상, 도깨비불, 백발과 같은 죽음에 대한 상념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작가 최인호가 이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한 <겨울 나그네>는 감미롭고 슬픈 첫사랑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가 메인 테마로 흐르며 방황하는 청춘과 엇갈린 사랑,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한다]
<영화 줄거리 요약>
사랑을 잃고 방황하며 추운 겨울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슈베르트의 동명 가곡에서 따온 영화 <겨울 나그네, 1986>. 자전거를 타고 대학 교정을 달리던 민우(강석우 분)는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첼로 캐이스와 악보를 들고 걸어가던 다혜(이미숙 분)와 부딪히며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세상살이에 숫기가 없는 의대생 민우와는 달리 세상의 평지풍파를 다 경험한 듯한 인물 현태(안성기 분)는 민우의 대학 선배이자 정신적 멘토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민우는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나고 자신의 출생 비밀까지 알게 되면서 인생의 큰 태풍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머지 가족은 해외로 도피한 후, 빚 독촉을 하는 채권자와의 폭력 사건에 휘말린 민우는 자신의 생모가 살았던 동두천의 기지촌으로 몸을 숨기며 순식간에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곳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치료해주던 민우는 은영(이혜영 분)을 만나게 되고 민우를 사랑하던 은영은 그의 아이를 낳게 된다. 하지만 민우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다혜뿐이다. 민우는 급기야 폭력조직에 연루되어 복역 후 출소하게 된다. 출소 후 다혜와의 짧은 재회로 하룻밤을 보내게 되지만, 서로의 벌어진 운명은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현태는 민우와 다혜 사이에서, 사랑의 메신저에서 다혜와의 연인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다. 사랑과 우정을 모두 잃은 민우는 다시는 다혜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자,  안타깝게도 쥐고 있던 자신의 생을 놓아 버리게 된다.
<관전 포인트>
A. 영화에서 현태의 역할은?
처음에는 자신의 후배인 민우를 친형처럼 잘 이끌고 도와주다가, 막상 민우의 여건이 어려워지자 그의 근황을 다혜에게 숨기며, 서서히 실의에 빠진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의 연인으로 다가가게 된다. 결국, 순수한 우정과 애정 사이에서 민우를 버리고 다혜와 결혼하게 된다. 민우를 잊지 못하던 다혜를 포기시키기 위해 민우가 은영과 같이 사는 초라한 저수지 옆 시골집으로 데려가 보여주는 장면에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현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간군상의 표본으로 좋아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B. 영화에서의 잊지 못할 장면은?
민우는 감옥에서 출소 후 다혜를 위해 목걸이 선물을 준비하지만  꿈에 그리던 다혜를 만나지 못하자, 쓸쓸히 내려오는 남산 계단 길에 하얀 눈이 내리며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Der Lindenbaum)가 한 가닥 남은 사랑의 희망에 절망한 민우의 슬픔을 끌어올린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오늘 밤도 지났네! 그 보리수 곁으로, 깜깜한 어둠 속에 눈 감아 보았네, 가지는 산들 흔들려 내게 말해주는 것 같네, “이리 내 곁으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고/찬 바람 세차게 불어와 얼굴을 매섭게 스치고, 모자가 바람에 날려도 나는 꿈쩍도 않았네, 그곳을 떠나 오랫동안 이곳저곳 헤매도 아직도 속삭이는 소리는 여기 와서 안식을 찾으라!]C. 민우의 출생 비밀은?
민우는  혼외자로 태어났고, 친어머니는 민우를 낳은 뒤 자살한 아픈 과거가 있다. 민우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가 매우 아름다운 천사일 거로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나중에 만난 범죄조직의 이모로부터 어머니와 이모는 보육원에서 자랐으며, 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D. 민우가 죽고 난 후 나타난 은영의 모습은?
민우가 경찰에 포위된 범죄 현장에서 스스로 죽고 난 후 은영은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면서 다혜 부부에게 민우의 아이를 부탁하고 사라진다. 현태와 다혜가 찾아간 민우의 무덤에서 현태는 “이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우리들의 젊은 날,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처럼 그 젊은 날을 어디로 사라졌는가!”라며 민우를 빼닮은 아이에게 한때 아버지의 별명 ‘피리 부는 소년’이라고 부르며 데리고 떠난다.

E. 청춘의 사랑과 고뇌를 주제로 한 영화들은?
@젊은 날의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그린 1951년 작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젊은 날의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사랑하지만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청춘들을 그린 1961년 작 ‘나탈리 우드와 워렌 비티’의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아름답게 시작했지만 작은 불씨로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고통과 마주하게 되는 청춘들을 그린 1981년 작 ‘브룩 쉴즈와 마틴 휴이트’의 <끝없는 사랑/Endless Love>로 ‘라이오넬 리치와 다이애나 로스’가 부른 주제곡도 유명하다.
<에필로그>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 중 ‘봄날의 꿈’에서 오직 사랑만을, 아름다운 소녀를, 뜨거운 마음과 입맞춤을, 기쁨과 행복을 꿈꾸었지만 <겨울 나그네>를 완성한 이듬해에 노래처럼 가난과 질병으로 31세의 꽃다운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서도, 따뜻한 봄과 같은 환한 사랑을 갈구하던 청춘이 뜻하지 않은 비극으로 자신의 삶과 사랑을 모두 잃고 겨울 나그네가 되어 눈이 내리는 인생의 추운 길로 쓸쓸히 사라지는 여정에서, 인생은 덧없는 찰나의 운명임을 공감하게 한다. 사랑할 때는 아름다운 꽃동산 속의 봄이지만, 이별할 땐 혹독한 눈보라 속의 겨울 나그네의 슬픈 운명은 우리들의 가슴 시린 피할 수 없는 사랑의 행로이다. 사랑을 잃은 젊은이여 겨울이 지나면 또다시 새로운 봄이 찾아오니 용기를 내어 그 빛을 찾아 나서라!

서태호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