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담의 삶삶한 글씨] 글씨안의 시공간

어떤것이 정답인지 막막하고 앞이 깜깜할 때 이 메시지를 써봤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사이다.
이런 힘있는 글씨를 쓸 때 나는 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단단한 소재의 크레파스도 좋지만,
안료와 오일이 풍부한 느낌의 오일파스텔이면 더 좋다.
‘그것으로 종이 위에 선을 던지고 선으로 공을 던진다.’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솟구치거나 내지르는 모양으로.
‘↗’ ‘↗’ ‘↗’ ‘↗’ ‘↗’ ‘↗’ ‘↗’ ‘↗’ ‘↗’ ‘↗’ ‘↗’
억제된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 중 하나가 쓰거나 그리는 행위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Freud,1856-1939)는
“예술은 환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가교이다. 예술가가 그 길을 찾는 방법은 혼자서 환상 세계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창작을 통하여 환상세계를 구체화하는 것에서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창작 활동은 무의식의 영역에 해당하는 심리세계로 유배당한 마음의 갈등과 좌절감을 초래한 요소들은 외면함으로써 오는 해방감과 고통의 경감을 가능하게한다.” 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정한 규칙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특정한 감정으로 부터 오는 것인가?
문자는 때로 감정으로부터의 언어를 내지르기도 하고,  속삭이기도 한다.
에너지를 분출하는 듯한 육필문자에서는 보는 사람도 분명히 그 에너지를 느낀다.
이런 류의 힘있는 광고 손글씨는 젊은 소비자를 타킷으로 하는 광고에
2000년대 중반부터 많이 사용되었고 그 시작은 ‘CF감독 백종열’이였다.
그는 활자로는 아쉬웠던 화면 속의 부족함에 자신의 글씨를 출연시켰다.
산돌에서 아티스트컬렉션 중 하나로 그의 서체를 만들기도했고
뒤이어 ‘아트디렉터 공병각’의 글씨도 인기를 누리며 서체로 나오기도 했다.
CF, 잡지, 포스터, 북커버 까지 숱하게 등장했던 손글씨에서는 생동하는 힘이 느껴진다.
그 문자들의 특징은 특정한 규칙을 가지고 나열되면서
시간과 공간을 느끼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전경을 볼 때 본능적으로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향한다.
이와 같이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향하는 시공간을 실제로
관찰할 수 있다고 나카모리(1980)는 분석했는데,
서구의 교회 벽화나 천장 설화에서 나타난 특징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사또루후지는 회화 ‘수태고지’를 그 예로 들었는데,
천사에서 마리아로 향하는 움직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그려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영화 타이틀이나 TV 광고 등의 스크린샷들을 지면에서 접하는것은
실제 영상으로 보는 작품을 봤을때의 제한된 인상과 영상의 잔상이다.
지면위에서 동적인 문자를 본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에밀루더는 정적 타이포그래피에서
이미 키네틱스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는 “타이포그래피는 항상 읽기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에
인쇄 매체상에서도 완벽한 정적인 타이포그래피는 존재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알파벳 중에서 B, C, D, E, F, K, L 등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서체들은 각각의 알파벳 기호 속에 곡선적인 요소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암시하는 요소들을 갖고 있고
활자를 이용하여 단어나 글줄을 구성할 때, 정적인 문자들 또한 읽는
방향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와 ‘↘’것과 같은 직선을 비교해 보면
오른쪽으로 올라간 ‘↗’은 상승, 오른쪽으로 내려간 ‘↘’은 하강의 느낌을 준다.
이것은 통계그래프에서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살표의 좌우가 반전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자의 배열에 있어서도 이처럼 대상을 읽는 눈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지점,
즉 오른쪽과 위로 향하는 사방향은 상승의 힘과 에너지를 느끼게 만든다.
고대 서구의 서법은 왼쪽에서부터 우측으로 써가는 서법으로 시작되었고
근대에 활자의 나열 방식이 되었다.
이와 같은 규칙은 오른쪽과 위쪽으로 향하는
사방향의 선이 많을수록 강하게 느껴진다.
그 조형적 특징은 과거에서 미래로 확장하는 시공간과 상승하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지면에서 시공간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
특정 회화나 문자표현의 미감이나 규칙을 단순히 좌우 문제로 풀 수는 없지만
문자를 보는 무의식에는 분명히 콘라드 랑게(Konrad Lange, 1855~1921)가
말한 일루전의 유희가 존재한다.
그는 예술을 받아들이는 목적 중 하나인 미적 쾌감은 ‘의식적인 자기기만’ 으로서
거리감이나 입체감과 같은 착각을 유희의 바탕에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상황은 무언가가 조금씩 쌓이고 쌓여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혼란스럽던 상황들에 익숙해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은 ‘인터스텔라’에서처럼
그 어떤 미지의 존재도 아닌 바로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한경닷컴칼럼리스트 정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