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사랑, 정호승

사랑

정호승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달은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나는 너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태헌의 한역]
愛(애)

花欲離水不可得(화욕리수불가득)
鳥欲離枝不可得(조욕리지불가득)
月欲離地不可得(월욕리지불가득)
吾欲離汝不可得(오욕리여불가득)[주석]
* 愛(애) : 사랑.
花(화) : 꽃. / 欲離(욕리) : ~을 떠나려고 하다, ~을 떠나고 싶어 하다. / 水(수) : 물. / 不可離(불가득) :  그럴 수가 없다, 떠날 수가 없다, 떠나지 못하다.
鳥(조) : 새. / 枝(지) : (나뭇)가지.
月(월) : 달. / 地(지) : 땅, 대지(大地). 이 시에서는 지구(地球)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吾(오) : 나. / 汝(여) : 너.

[직역]
사랑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새는 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달은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한역 노트]
시인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상황을 ‘사랑’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사랑은 일종의 구속인 걸까? 사랑의 속성 가운데는 얼마간 구속과 비슷한 요소가 있으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의 구속’은 보통 자발적이고, 기꺼이 하는 것이고,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구속과는 분명 다르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구속’인 셈이다.
물가의 꽃이 물을 떠난다면 꽃을 피울 수가 없고, 숲에 사는 새가 나뭇가지를 떠난다면 둥지를 틀 수 없다. 달이 지구를 떠난다면 달은 무엇을 비출 것이며, 지구는 또 캄캄한 밤을 어떻게 감당해낼 것인가? 시인은 단순 병렬로 연결된 이 세 가지의 사물을 앞세운 뒤에 ‘사람의 사랑’으로 내가 너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아마도 시인은 “내가 너를 떠난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때때로 미워져도, 그리하여 정말 떠나고 싶어져도, 그 미움이 잦아들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그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이 시에서 시인이 보여준 사랑에 대한 관점은 그러하다.
역자는 이 시를 한역하면서 주제를 집중시키는 방식으로서의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과 반복이 주는 힘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김삿갓의 시(詩) 한 연(聯)을 불현듯 떠올려보게 되었다.

月白雪白天地白(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세상이 흰데
山深夜深客愁深(산심야심객수심) 산도 깊고 밤도 깊고 나그네 시름도 깊네.

역자는 고교시절 그 어느 겨울에, 연탄불이 꺼져 냉골이 된 자취방에서 새벽에 깨어나 석가탄(번개탄)으로 다시 연탄불을 피우기 위하여 출입문을 열었다가,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인 위에 찬란하게 빛나던 달빛을 바라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 시구를 읊조려본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기나 마찬가지인 10대 후반 그 시절에, 난감한 가운데 바라보았던 희디 흰 눈빛이며 달빛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전 세계 어느 언어에서나 공통으로 보이는, 가장 원시적인 문장구조인 주술구조(主述構造)를 한 시구(詩句) 안에서 세 번씩, 그것도 동일한 술어를 사용하면서 반복시킨 김삿갓의 위의 시구는, 확실히 단순함과 반복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구가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까닭은 단순함이 반복되면서 힘을 더하고, 그 힘이 다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감동은 곧 아름다움이다. 단순함과 반복이 주는 감동은, 저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Gettysburg Address]에 보이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과 같은 영문(英文)에서도 확인된다.
역자는 4연 8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4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는데 매구에 동자(同字)로 압운하였다.
2020. 6. 23.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