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강물, 오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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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오세영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태헌의 한역]
江水(강수)
切莫只看前方進(절막지간전방진)
江水逢壁轉身行(강수봉벽전신행)
切莫躁急亦促急(절막조급역촉급)
瀑布激流至沼平(폭포격류지소평)
無心江水到永遠(무심강수도영원)
空虛心舟達充盈(공허심주달충영)
[주석]
* 江水(강수) : 강물
切莫(절막) : 절대 ~을 하지 마라. / 只看前方(지간전방) : 다만 앞을 보기만 하다. / 進(진) : 나아가다.
逢壁(봉벽) : (절)벽을 만나다. / 轉身(전신) : 몸을 돌리다, 되돌아서다. / 行(행) : 가다.
躁急(조급) : 조급해 하다. / 亦(역) : 또한, 역시. / 促急(촉급) : 촉급하다, 서두르다.
瀑布(폭포) : 폭포. / 激流(격류) : 격류. / 至沼平(지소평) : 소(沼)에 이르러 평온해지다, 소에 이르러 고요해지다.
無心(무심) : 무심하다, 무심한. / 到永遠(도영원) : 영원에 이르다.
空虛(공허) : 공허하다, 텅 비다. / 心舟(심주) : 마음의 배, 마음. ‘마음’을 가리키는 한자어가 제법 있지만 위에 보이는 ‘강물’과 ‘~에 이른다’는 표현을 감안하여 나름대로 조어(造語)해본 것이다. 현대인 가운데 ‘마음’을 ‘心舟’로 묘사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 達充盈(달충영) : 충만(充滿)에 이르다. ‘充盈’은 ‘充滿’과 같은 의미의 한자어이다. 압운 때문에 ‘充盈’이라는 한자어를 취하게 되었다.[직역]
강물
절대 그저 앞만 보고 가지마라
절벽 만난 강물은 몸을 돌려 간다
절대 조급해 하지도 서둘지도 마라
폭포의 격류도 소에서는 고요해진다
무심한 강물은 영원에 이르고
텅 빈 마음은 충만에 이른다
[한역 노트]
역자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노자(老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은 바로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아닌가 싶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이 말은, 확실히 노자의 핵심적인 명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말은, 후속되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언급에 일차적인 방점이 찍히므로, 일단 물의 ‘기능’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부드러운 것이 딱딱한 것을 이긴다.”는 뜻의 “유지승강(柔之勝剛)”은, 물이 무리를 지으면 돌로 된 제방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므로, 물의 ‘속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오세영 시인의 위의 시는 물의 기능보다는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시상을 전개하며 노자적(老子的)인 세계관을 보여준 작품으로 간주된다.
상당히 여러 해 전에 어느 여자대학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인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을 보고, 역자는 이 문구를 만든 사람은 아무래도 ≪노자≫를 아는 분일 듯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자가 ≪노자≫를 달달 외울 정도로 읽지는 못했지만, 노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하나 들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부드러움[柔]”이라고 말할 정도의 배짱은 있다. 부드러움은 여성(女性)의 모습이자 여성의 강점이면서 또한 결코 무리하지 않는 순리(順理)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은, 그 학교가 여자대학이라는 객관적인 사실과 순리를 중시하며 세상을 바꿀 인재를 키우겠다는 교육 철학을 보여준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시에서처럼 절벽을 만나 뒤로 돌아가는 강물과, 수직(垂直) 낙하라는 격정의 시간을 보낸 후에 고요해지는 폭포수는 순리와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끝없는 전진도, 끝없는 격정도 없다. 전진하다가 뒤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격정을 한껏 발산시키다가 가라앉히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고요해지는 강물이 그리하여 영원에 이를 수가 있고, 비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가득 찬 세상’, 곧 이데아(Idea)의 세계로 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주지(主旨)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자는 이를 강물이 시간적으로는 영원히 흐른다는 것과, 공간적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영원을 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어떤 조그마한 것 하나를 내려놓지 못해 추한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들을 볼 때면, 역자가 무엇보다 ≪노자≫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어지는 까닭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 있다. ≪노자≫를 읽고서도 고요해지지 못하고, 부드러워지지 못한다면 2독, 3독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들의 확고한 철학적인 무장(武裝)은 액세서리가 아니라 신성한 책무이다. 그러므로 ‘다스림’ 역시 궁극으로는 저 강물이 순리를 따라 강물의 이데아인 바다로 흘러가듯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도자들에게는 앞서 얘기한 순리와 부드러움, 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없을 듯하다.
역자는 3연 10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6구로 된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行(행)’·‘平(평)’·‘盈(영)’이다.
2020. 7. 21.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
오세영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태헌의 한역]
江水(강수)
切莫只看前方進(절막지간전방진)
江水逢壁轉身行(강수봉벽전신행)
切莫躁急亦促急(절막조급역촉급)
瀑布激流至沼平(폭포격류지소평)
無心江水到永遠(무심강수도영원)
空虛心舟達充盈(공허심주달충영)
[주석]
* 江水(강수) : 강물
切莫(절막) : 절대 ~을 하지 마라. / 只看前方(지간전방) : 다만 앞을 보기만 하다. / 進(진) : 나아가다.
逢壁(봉벽) : (절)벽을 만나다. / 轉身(전신) : 몸을 돌리다, 되돌아서다. / 行(행) : 가다.
躁急(조급) : 조급해 하다. / 亦(역) : 또한, 역시. / 促急(촉급) : 촉급하다, 서두르다.
瀑布(폭포) : 폭포. / 激流(격류) : 격류. / 至沼平(지소평) : 소(沼)에 이르러 평온해지다, 소에 이르러 고요해지다.
無心(무심) : 무심하다, 무심한. / 到永遠(도영원) : 영원에 이르다.
空虛(공허) : 공허하다, 텅 비다. / 心舟(심주) : 마음의 배, 마음. ‘마음’을 가리키는 한자어가 제법 있지만 위에 보이는 ‘강물’과 ‘~에 이른다’는 표현을 감안하여 나름대로 조어(造語)해본 것이다. 현대인 가운데 ‘마음’을 ‘心舟’로 묘사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 達充盈(달충영) : 충만(充滿)에 이르다. ‘充盈’은 ‘充滿’과 같은 의미의 한자어이다. 압운 때문에 ‘充盈’이라는 한자어를 취하게 되었다.[직역]
강물
절대 그저 앞만 보고 가지마라
절벽 만난 강물은 몸을 돌려 간다
절대 조급해 하지도 서둘지도 마라
폭포의 격류도 소에서는 고요해진다
무심한 강물은 영원에 이르고
텅 빈 마음은 충만에 이른다
[한역 노트]
역자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노자(老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은 바로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아닌가 싶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이 말은, 확실히 노자의 핵심적인 명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말은, 후속되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언급에 일차적인 방점이 찍히므로, 일단 물의 ‘기능’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부드러운 것이 딱딱한 것을 이긴다.”는 뜻의 “유지승강(柔之勝剛)”은, 물이 무리를 지으면 돌로 된 제방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므로, 물의 ‘속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오세영 시인의 위의 시는 물의 기능보다는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시상을 전개하며 노자적(老子的)인 세계관을 보여준 작품으로 간주된다.
상당히 여러 해 전에 어느 여자대학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인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을 보고, 역자는 이 문구를 만든 사람은 아무래도 ≪노자≫를 아는 분일 듯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자가 ≪노자≫를 달달 외울 정도로 읽지는 못했지만, 노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하나 들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부드러움[柔]”이라고 말할 정도의 배짱은 있다. 부드러움은 여성(女性)의 모습이자 여성의 강점이면서 또한 결코 무리하지 않는 순리(順理)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은, 그 학교가 여자대학이라는 객관적인 사실과 순리를 중시하며 세상을 바꿀 인재를 키우겠다는 교육 철학을 보여준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시에서처럼 절벽을 만나 뒤로 돌아가는 강물과, 수직(垂直) 낙하라는 격정의 시간을 보낸 후에 고요해지는 폭포수는 순리와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끝없는 전진도, 끝없는 격정도 없다. 전진하다가 뒤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격정을 한껏 발산시키다가 가라앉히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고요해지는 강물이 그리하여 영원에 이를 수가 있고, 비어 있는 사람의 마음이 ‘가득 찬 세상’, 곧 이데아(Idea)의 세계로 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주지(主旨)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자는 이를 강물이 시간적으로는 영원히 흐른다는 것과, 공간적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영원을 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어떤 조그마한 것 하나를 내려놓지 못해 추한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들을 볼 때면, 역자가 무엇보다 ≪노자≫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어지는 까닭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 있다. ≪노자≫를 읽고서도 고요해지지 못하고, 부드러워지지 못한다면 2독, 3독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들의 확고한 철학적인 무장(武裝)은 액세서리가 아니라 신성한 책무이다. 그러므로 ‘다스림’ 역시 궁극으로는 저 강물이 순리를 따라 강물의 이데아인 바다로 흘러가듯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도자들에게는 앞서 얘기한 순리와 부드러움, 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없을 듯하다.
역자는 3연 10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6구로 된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行(행)’·‘平(평)’·‘盈(영)’이다.
2020. 7. 21.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