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쉬는 날,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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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김용택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빛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태헌의 한역]
休日(휴일)
君輩圖生費心多(군배도생비심다)
今日只休詩亦置(금일지휴시역치)
立於淸秋靑天邊(입어청추청천변)
脚蹴殘陽喫遊戱(각축잔양끽유희)[주석]
* 休日(휴일) : 쉬는 날.
君輩(군배) : 그대들. / 圖生(도생) : 삶을 도모하다, 살다. / 費心多(비심다) : 마음씀이 많다, 애씀이 많다.
今日(금일) : 오늘. / 只休(지휴) : 그저 쉬다, 그냥 쉬다. / 詩亦置(시역치) : 시 또한 버려두다. 원시의 ‘시도 읽지 말고’를 약간 변형시켜 한역한 것이다.
立於(입어) : ~에 서다. / 淸秋(청추) : 맑은 가을. / 靑天邊(청천변) : 푸른 하늘가. ‘靑’은 한역의 편의를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탠 글자이다.
脚蹴(각축) : 발로 ~을 차다. / 殘陽(잔양) : 기울어져 가는 햇볕, 시드는 햇볕. / 喫遊戱(끽유희) : 유희를 만끽하다, 실컷 놀다.
[한역의 직역]
쉬는 날
그대들 사느라 애 많이 썼으니
오늘은 그냥 쉬며 시도 버려두어라
맑은 가을 푸른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빛 발로 차며 푹 놀아라
[한역 노트]
연륜(年輪)이 풍부해 보이는 시적 화자가 다수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당부의 말로 엮어진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시를 읽는 것조차 ‘온전한 쉼’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시라고 특정하였을까? 글쓴이가 시인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역자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소설이나 희곡의 경우는 스토리가 다소 긴박하게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저절로 궁금해지는 뒷얘기 때문에 읽다가 중간에서 멈추기 어려울 때가 많다. 수필의 경우는 그런 긴장감이 별로 없고 편폭 또한 그리 길지 않아도 대개 작가가 풀어가는 그 내용 때문에 한 편 전체를 집중해서 읽어야 할 때가 많다. 이에 반해 시집에 수록된 시의 경우는 여타의 문학 장르와 달리 짧은 시간에 읽고 감상할 수도 있어, 어느 페이지에서든 책갈피를 끼워두고 책을 덮을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이완(弛緩)이나 힐링을 위해 시가 비교적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문학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시도 읽지 말라고 한 것은 ‘시 읽기’조차 일이나 학습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쉬는 날 무엇을 하면서 쉴 것인가에는 정답이 따로 없다. 저마다 자기 취향이나 의지에 따라,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최대한 편하게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쉬는 것에 ‘활력(活力) 재충전’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을 얹어두게 된다면, 그것은 종국에 하나의 ‘일’이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쉬고 나서 오히려 뒷날이 더 피곤해지는 원인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살피자면 원시의 제4행은 휴식을 위해 최소화된 움직임을 ‘주문’하는 시구로 이해된다. 한역시에서 살리지 못했던 의태어 ‘툭툭’이 동작의 범위가 그리 크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햇빛을 찬다’는 독특한 말은 동작의 강도(强度)가 그리 세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예찬한 청한지연(淸閒之燕:조용한 휴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적된 피로 앞에서는 제왕(帝王)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 사이사이의 휴식은 수밀도(水蜜桃)처럼 달콤한 것이겠지만, 일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휴식은 고통을 넘어 하나의 형벌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단순히 금전적 가치로만 환산할 수 없는 ‘일’을 찾는 ‘일’이 어찌 개개인만의 문제일 뿐이겠는가! 사회와 국가가 무엇보다 먼저 이런 문제에 역량을 쏟을 때 그런 조직의 존재 이유가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상태이지만 쉬러 갈 곳도 없고 행여 가더라도 할 일이 거의 없다. 일하고 쉬고 다시 일을 했던 과거의 평범한 일상들이 이즈음처럼 대단하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던 듯하다. 인공위성을 하늘에다 별로 띄우는 인류이지만, 작은 바이러스 하나 아직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바이러스를 물리쳐줄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언제쯤 반가운 님처럼 이 누리에 찾아들까?
연 구분 없이 4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4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시의 압운자는 ‘置(치)’·‘戱(희)’이다.
2020. 9. 15.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
김용택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빛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태헌의 한역]
休日(휴일)
君輩圖生費心多(군배도생비심다)
今日只休詩亦置(금일지휴시역치)
立於淸秋靑天邊(입어청추청천변)
脚蹴殘陽喫遊戱(각축잔양끽유희)[주석]
* 休日(휴일) : 쉬는 날.
君輩(군배) : 그대들. / 圖生(도생) : 삶을 도모하다, 살다. / 費心多(비심다) : 마음씀이 많다, 애씀이 많다.
今日(금일) : 오늘. / 只休(지휴) : 그저 쉬다, 그냥 쉬다. / 詩亦置(시역치) : 시 또한 버려두다. 원시의 ‘시도 읽지 말고’를 약간 변형시켜 한역한 것이다.
立於(입어) : ~에 서다. / 淸秋(청추) : 맑은 가을. / 靑天邊(청천변) : 푸른 하늘가. ‘靑’은 한역의 편의를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탠 글자이다.
脚蹴(각축) : 발로 ~을 차다. / 殘陽(잔양) : 기울어져 가는 햇볕, 시드는 햇볕. / 喫遊戱(끽유희) : 유희를 만끽하다, 실컷 놀다.
[한역의 직역]
쉬는 날
그대들 사느라 애 많이 썼으니
오늘은 그냥 쉬며 시도 버려두어라
맑은 가을 푸른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빛 발로 차며 푹 놀아라
[한역 노트]
연륜(年輪)이 풍부해 보이는 시적 화자가 다수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당부의 말로 엮어진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시를 읽는 것조차 ‘온전한 쉼’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시라고 특정하였을까? 글쓴이가 시인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역자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소설이나 희곡의 경우는 스토리가 다소 긴박하게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저절로 궁금해지는 뒷얘기 때문에 읽다가 중간에서 멈추기 어려울 때가 많다. 수필의 경우는 그런 긴장감이 별로 없고 편폭 또한 그리 길지 않아도 대개 작가가 풀어가는 그 내용 때문에 한 편 전체를 집중해서 읽어야 할 때가 많다. 이에 반해 시집에 수록된 시의 경우는 여타의 문학 장르와 달리 짧은 시간에 읽고 감상할 수도 있어, 어느 페이지에서든 책갈피를 끼워두고 책을 덮을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이완(弛緩)이나 힐링을 위해 시가 비교적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문학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시도 읽지 말라고 한 것은 ‘시 읽기’조차 일이나 학습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쉬는 날 무엇을 하면서 쉴 것인가에는 정답이 따로 없다. 저마다 자기 취향이나 의지에 따라,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최대한 편하게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쉬는 것에 ‘활력(活力) 재충전’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을 얹어두게 된다면, 그것은 종국에 하나의 ‘일’이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쉬고 나서 오히려 뒷날이 더 피곤해지는 원인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살피자면 원시의 제4행은 휴식을 위해 최소화된 움직임을 ‘주문’하는 시구로 이해된다. 한역시에서 살리지 못했던 의태어 ‘툭툭’이 동작의 범위가 그리 크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햇빛을 찬다’는 독특한 말은 동작의 강도(强度)가 그리 세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예찬한 청한지연(淸閒之燕:조용한 휴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적된 피로 앞에서는 제왕(帝王)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 사이사이의 휴식은 수밀도(水蜜桃)처럼 달콤한 것이겠지만, 일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휴식은 고통을 넘어 하나의 형벌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단순히 금전적 가치로만 환산할 수 없는 ‘일’을 찾는 ‘일’이 어찌 개개인만의 문제일 뿐이겠는가! 사회와 국가가 무엇보다 먼저 이런 문제에 역량을 쏟을 때 그런 조직의 존재 이유가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상태이지만 쉬러 갈 곳도 없고 행여 가더라도 할 일이 거의 없다. 일하고 쉬고 다시 일을 했던 과거의 평범한 일상들이 이즈음처럼 대단하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던 듯하다. 인공위성을 하늘에다 별로 띄우는 인류이지만, 작은 바이러스 하나 아직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바이러스를 물리쳐줄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언제쯤 반가운 님처럼 이 누리에 찾아들까?
연 구분 없이 4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4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시의 압운자는 ‘置(치)’·‘戱(희)’이다.
2020. 9. 15.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