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경 칼럼] '승려'가 '중'이라 불리는 것도 과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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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혜민 승려와 현각 승려와의 공방으로 sns가 시끄럽네요. 가끔 들여다보는 페북에 심심찮게 그들의 이야기가 오르내려서 뭔가 하고 들여다봤더니 참으로 시답잖은 말 장난(?)으로 보여서 피식 웃었습니다. 제가 웃은 이유는 ‘뭐 그렇지’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뭐 그렇지’라고 생각한 대는 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호칭입니다.
‘승려’를 ‘스님’이라고 일괄해서 부르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사실 어떤 ‘직’에 대해서 ‘님’자를 붙이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에 합당하게 행동할때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전에도 “스님은 승려가 자신의 스승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러는 생각이 머리깍고 승복만 입으면 지나개나 다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보니 승려도 못 되는 ‘중’같지도 못한 인간들도 모두 ‘스님’이라 불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중도 못되는 자신을 일컬어 ‘ㅇㅇ스님입니다’라고 소개한다는 것입니다.사실 저는 이런 것들에 매우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간의 본질과 그 운행과 함께 띠라오는 행실의 어떠함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 제대로 수도하는 자라면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저는 출가 수행자 ㅇㅇ입니다”하고 소개해야 옳습니다. 그가 속칭(속칭라고 하는 이유는 절이 커야할 이유도 없고 큰 절이라는 것 가체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종교에 동일합니다) 큰 절의 주지여도 그렇게 말 하는 자라야 비로소 저는 그와 대면할 마음을 조금 냅니다.
제가 마음을 조금 내는 이유는 말은 그리하고도 생각이 교만한 중들도 여럿봤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도 과거에 몇몇의 승려들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승려들을 잘 모를 때는 절의 규모가 크면 그 절의 주지도 그만한 수행을 한 사람일거란 생각을 했었는데 만나보니 그것은 큰 착각이었음을 알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가 불교의 입문을 공부하겠다고 결정한 스님을 만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제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지 못할 만큼의 깊은 수행을 한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저의 스승이시기도 하고 그분의 수행에 경의심을 갖고 있기에 저는 기꺼이 스님 중에 큰 스님이라 부릅니다.)작은 암자에서 수행하시는 주지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소개할때 그어떤 수식어도 쓰지않고 법명만 간단히 말씀하시더군요. 그분이 주지라는 것은 나중에 타인을 통해 알았습니다. 제가 만난 최고의 승려인 이분을 소개하자면 긴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매우 독특하고 깊으며 부드러운 것입니다. 고로 승려라면 그러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늘 자신을 살피고 또 살펴 깊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런 의미로 메스컴에 나와 떠드는 수행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저는 일단 신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혜민이라는 자가 TV에 나와 떠드는 말을 우연히 두어번 듣다가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속된말로 새파랗게 젊은 자가 얕은 지식 몇가지로 주저리 떠드는 모양새가 한숨이 나와서 채널을 돌린 기억이 나와서 작금의 일들은 사필귀정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새파랗다고 한 말’은 사실 비아냥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의 수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특별한 케이스들이야 모든 경우에 항상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말’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철학(인생관, 세계관, 신조)을 담고 있을때 비로소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없이 툭 내뱉는 말, 무식하여 자신도 모르면서 떠드는 말, 알맹이 없이 장난치는 가치없는 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중상모략하는 말, 타인에게 상처를 줄 요량으로 작심하고 떠드는 말과 같은 말은 말에 대한 모욕입니다. 특히 ‘님’자를 듣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말을 조심히 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님’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면 안 될 것입니다. 또한 함부로 ‘님’이라 부르지도 말아야 합니다.
※ 필자의 의견은 한경닷컴의 공식적인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오미경(글보리)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호칭입니다.
‘승려’를 ‘스님’이라고 일괄해서 부르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사실 어떤 ‘직’에 대해서 ‘님’자를 붙이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에 합당하게 행동할때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전에도 “스님은 승려가 자신의 스승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러는 생각이 머리깍고 승복만 입으면 지나개나 다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보니 승려도 못 되는 ‘중’같지도 못한 인간들도 모두 ‘스님’이라 불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중도 못되는 자신을 일컬어 ‘ㅇㅇ스님입니다’라고 소개한다는 것입니다.사실 저는 이런 것들에 매우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간의 본질과 그 운행과 함께 띠라오는 행실의 어떠함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 제대로 수도하는 자라면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저는 출가 수행자 ㅇㅇ입니다”하고 소개해야 옳습니다. 그가 속칭(속칭라고 하는 이유는 절이 커야할 이유도 없고 큰 절이라는 것 가체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종교에 동일합니다) 큰 절의 주지여도 그렇게 말 하는 자라야 비로소 저는 그와 대면할 마음을 조금 냅니다.
제가 마음을 조금 내는 이유는 말은 그리하고도 생각이 교만한 중들도 여럿봤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도 과거에 몇몇의 승려들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승려들을 잘 모를 때는 절의 규모가 크면 그 절의 주지도 그만한 수행을 한 사람일거란 생각을 했었는데 만나보니 그것은 큰 착각이었음을 알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가 불교의 입문을 공부하겠다고 결정한 스님을 만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제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지 못할 만큼의 깊은 수행을 한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저의 스승이시기도 하고 그분의 수행에 경의심을 갖고 있기에 저는 기꺼이 스님 중에 큰 스님이라 부릅니다.)작은 암자에서 수행하시는 주지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소개할때 그어떤 수식어도 쓰지않고 법명만 간단히 말씀하시더군요. 그분이 주지라는 것은 나중에 타인을 통해 알았습니다. 제가 만난 최고의 승려인 이분을 소개하자면 긴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매우 독특하고 깊으며 부드러운 것입니다. 고로 승려라면 그러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늘 자신을 살피고 또 살펴 깊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런 의미로 메스컴에 나와 떠드는 수행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저는 일단 신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혜민이라는 자가 TV에 나와 떠드는 말을 우연히 두어번 듣다가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속된말로 새파랗게 젊은 자가 얕은 지식 몇가지로 주저리 떠드는 모양새가 한숨이 나와서 채널을 돌린 기억이 나와서 작금의 일들은 사필귀정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새파랗다고 한 말’은 사실 비아냥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의 수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특별한 케이스들이야 모든 경우에 항상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말’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철학(인생관, 세계관, 신조)을 담고 있을때 비로소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없이 툭 내뱉는 말, 무식하여 자신도 모르면서 떠드는 말, 알맹이 없이 장난치는 가치없는 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중상모략하는 말, 타인에게 상처를 줄 요량으로 작심하고 떠드는 말과 같은 말은 말에 대한 모욕입니다. 특히 ‘님’자를 듣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말을 조심히 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님’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면 안 될 것입니다. 또한 함부로 ‘님’이라 부르지도 말아야 합니다.
※ 필자의 의견은 한경닷컴의 공식적인 견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오미경(글보리)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