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미국 사회 '아시안 혐오'의 이면

코로나 사태로 흉흉해진 일상
"그래도 아시아계는 잘나간다"
질시·견제심리가 증오로 확산

집단 편 가르고 남 탓하는
'현대진보이론'까지 가세

이학영 상임논설고문
작년 11월 미국 워싱턴주 레이시의 노스서스턴 공립학교위원회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관내 학생들의 ‘인종별 기회평등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아시아계 학생들을 유색인종(colors)이 아니라 백인(whites) 집단에 포함시킨 것이다. “아시아계를 유색인종으로 분류하기에는 학업성취도가 너무 뛰어나다”는 이유에서였다. 논란이 커지자 웹사이트에서 끌어내렸지만, 보고서 파동은 아시아계를 견제와 질시의 눈으로 보는 미국 사회의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노스서스턴 사건’은 미국 좌파 운동가들이 개발한 ‘현대진보이론(MPT: modern progressive theory)’을 교육행정에 적용하려는 구체적 사례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받았다. MPT의 핵심은 인종을 피부와 얼굴 생김새 등 신체 특징이 아니라 ‘억압자(oppressor)’와 ‘피(被)억압자(oppressed)’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학업 성적이 월등하게 뛰어나고, 그 덕분에 고소득 전문직에 대거 진출하는 아시아계는 백인과 같은 ‘억압자’ 집단에 소속시켜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계와 인도계를 한데 포함시키려다 보니 ‘백인 비스름한 집단(white-adjacent)’이라는 희한한 표현까지 만들어냈다.아시아계가 얼마나 ‘튀기에’ 이렇게까지 견제받게 됐는지를 조지 W 부시 대통령 연설문 담당이었던 작가 윌리엄 맥건은 몇 가지 사례로 추적했다. “2019년 뉴욕시 유치원 아동 가운데 아시아계 비중이 17%인데 우수 아동으로 선정된 비율은 42%에 달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문 로웰고등학교가 최근 입학사정 기준을 바꿨다. 지나치게 높은 아시아계 학생들의 합격률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대학들에도 ‘다른 인종의 입학 기회를 좀먹는’ 아시아계 지원자들을 떨어뜨리는 일이 초미의 과제가 됐다. 하버드대가 입학사정 기준으로 ‘주관적 성격 평가’ 항목을 신설하고는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용기와 리더십, 호감도 등의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며 대거 낙제점을 주고 있는 게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작년 초 몰아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진원지가 아시아 국가인 중국이라는 사실까지 맞물리면서 미국 사회의 아시아계에 대한 배척심리는 더욱 불붙고 있다. 지난주 한국계 이민자들이 대거 희생된 애틀랜타 총격사건 등 최근 아시아계를 겨냥한 인종혐오 범죄 급증을 일과성 현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 ‘쿵플루(중국 무술인 쿵푸와 인플루엔자 합성어)’ 등으로 부르며 인종적 증오를 부추긴 것을 탓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제 양극화의 직격탄을 흑인과 히스패닉 등 다른 소수인종이 집중적으로 맞고 있는 현실도 최근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코로나 방역을 위한 봉쇄조치가 식당 등 접객업소에서 일하거나 일용직으로 주로 근무해온 흑인·히스패닉계 근로자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히고 있는데, 이에 대한 불만을 아시아계에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피즘’의 토양이 됐던 다수 저소득 백인도 마찬가지다. 주목되는 것은 백인 주류집단이 미국 사회의 고질적 차별 논란을 비껴가는 방편으로 “아시아계를 보라. 그들은 잘 해내고 있지 않느냐”며 아시아계를 방패막이 삼아온 게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분석이다. 아시아계를 가리키는 ‘모범적 소수인종론(model minority)’이 되레 아시아계를 더 곤경에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애틀랜타 총격사건은 백인과 다른 인종집단 간에 낀 신세가 돼 분풀이 대상이 돼온 아시아계의 쌓인 분노와 위기감을 폭발시켰고, 미국 사회에 크고 무거운 숙제를 던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애틀랜타를 찾아가 “아시아계 미국인이 겪는 고통에 공감한다”고 위로하는 등 수습에 진땀을 흘리고 있지만, 그 정도로 지나가기에는 아시아계는 물론 미국 사회 전체가 입은 충격과 상처가 너무나 깊어 보인다. 세계 최강의 문화와 문명국가를 자임해온 미국이 또 한 번의 기로에 섰다. 끊임없이 집단 간 편을 가르고 누군가를 탓하며 사회문제화하는 것을 동력으로 삼는 ‘현대진보이론’이 아시아계 혐오에 불을 질렀다는 관찰은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만의 일 같지 않아서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