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작가가 '이름나는 통로'…그게 내 역할"

뚝심 출판인 (5)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1998년 귀농책으로 시작했지만
일본 문학 '공중그네' 대히트
'7년의 밤' 정유정 작가 발굴하며
문학전문 출판사 자리매김

황산벌문학상 등 공모전 후원 확대
한권에 장편 서너편씩 연재하는
'악스트'로 문학잡지 틀도 바꿔
가능성 있는 신인 작가를 발굴해온 은행나무의 주연선 대표가 문학잡지 ‘악스트’와 문학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국내 문학 출판 분야엔 전통적인 강자가 많았어요. 대다수가 유명 작가들을 보유하고 있어 진입장벽이 컸죠. 숨어 있는 새로운 작가들을 직접 발굴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예요. 그런 차별화가 지금 우리만의 색깔을 갖게 해준 겁니다.”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59)는 “새로운 스타일과 기법으로 무장한 문학 작가들을 찾아내고 천천히 그들의 작품을 기다리는 ‘우보만리(牛步萬里)’ 정신으로 출판사를 이끌어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주 대표를 23일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에서 만났다.주 대표는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2월 은행나무를 세웠다. 이듬해 낸 첫 책은 문학서가 아니라 귀농 소개서 《서울사람 성공하는 귀농전략》이었다. 때마침 퇴직 후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책은 폭발적으로 팔렸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꾸준히 팔릴 수 있는 대중소설을 내 최소한의 생존 기반을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비석 작가의 《손자병법》을 재출간해 30만 부를 팔았다. 《대장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등 인기 드라마의 원작소설들도 한류 바람을 타고 일본, 중국, 대만 등 아시아 각국에 수출돼 효자노릇을 했다.

주 대표가 은행나무를 문학 출판사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건 일본문학으로 눈을 돌리면서였다. 판권을 가진 일본 문예춘추를 설득해 2005년 출간한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가 국내에서 100만 부 넘게 팔리며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을 통해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특징을 고루 갖춘 작품이 독자들에게 통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문학은 순수성이 강조돼야 한다는 장르적 경계를 깨고 싶었죠. 국내에도 흥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진 작가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학 출판사의 핵심 역량은 한국문학을 다루느냐 여부에 달렸다. 주 대표는 이미 유명한 국내 작가의 신작 대신 스토리의 힘을 가진 새 작가를 발굴해 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를 위해 2009년부터 세계문학상을 후원했고 여기서 미스터리 소설의 대가로 불리는 정유정 작가를 찾아냈다. 이후 출간한 정 작가의 장편소설 《28》 《종의 기원》 《7년의 밤》 등이 잇달아 흥행하면서 그의 ‘기대’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후 지금까지 황산벌문학상, 제주 4·3 평화문학상, 한경 신춘문예 등 공모전을 후원하며 신진 작가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주 대표는 2010년부터 출간한 계간지 ‘문학과 오늘’을 과감히 포기하고 2015년 ‘악스트’를 새로 창간하며 또 다른 도전을 감행했다. 기존 문예지들과 달리 작가가 작가를 인터뷰하고, 편집장이 표지 사진을 찍었다. 문예지 한 권에 장편소설 한 편만 싣던 기존의 연재 틀에서 벗어나 여러 작가가 각각 서너 편씩 짧게 오래 연재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창간호 1만 부가 매진되는 등 언론과 독자들은 그의 새로운 실험에 주목했다.

“다양한 작가가 나오려면 이들과 작품으로 꾸준히 소통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기존 출판사들 역시 문예지의 비효율성을 인지하고 잡지 형식으로 변화를 고민할 때였어요. 마침 대만과 일본에서 판매되던 문학잡지 스타일을 보고 이를 접목했죠. 이후 많은 문학 출판사가 비슷한 형태로 문학잡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문학계를 주도한 첫 사례이자 회사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는 코로나19로 재택 시간이 늘어난 만큼 검증된 책을 소비하는 이들 또한 많아지리라 확신했다. “책 읽기란 인간에게 없어질 수 없는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출판의 미래는 충분히 있습니다. 보다 좋은 문학 목록들을 만들기 위해 뛰어난 작가 발굴에 더 신경 쓸 생각입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