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시]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나비였네.

落花枝にかへると見れば胡蝶かな
-아라키다 모리타케


꽃그늘 아래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花の陰あかの他人はなかりけり
-고바야시 잇사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는 연한 바람 속에서 읽을 때 가장 맛깔스럽다.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봄날, 몽환적인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잎과 바람에 실려 다시 올라가는 잎, 그것을 나비의 날갯짓으로 겹쳐놓은 재주가 신기에 가깝다.

이 시를 쓴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1473~1549)는 일본의 대중적인 하이카이(하이쿠의 전신)에 품격과 예술적인 풍류를 더한 중세 시인이다.

허공에 날리는 꽃잎 중 하나가 나뭇가지로 돌아간다니 소멸이 생명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숨 한 번 길이만큼의 시’로 불리는 하이쿠의 압축과 생략미를 마음껏 발휘한 시라고 할까. ‘모습은 보이고 마음은 감추라’는 시작(詩作) 원칙이 그의 시에서 더욱 빛난다.하이쿠란 5-7-5의 17자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다. 글자 수만 맞추는 게 아니라 기본 작법도 철저히 지킨다. 계절 감각을 나타내는 말을 꼭 넣어야 하고, 첫 구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져야 하며, 반드시 끊어 읽는 맛이 나게 해야 한다. 짧지만 촌철살인의 지혜와 통찰을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이런 작법 덕분이다.

죽기 전에 그는 ‘내 전 생애가/ 나팔꽃만 같아라/ 오늘 아침은’이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바람에 잘 찢기는 나팔꽃의 꽃말이 ‘덧없음’인 걸 생각하면 더없이 허무한 듯하다. 그러나 떨어지는 꽃잎에서 날아오르는 나비를 발견한 그의 생은 오히려 생명과 승화의 이미지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에즈라 파운드가 이 하이쿠를 영어로 소개하면서 “옛날 중국의 한 시인은 12행으로 다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단언했는데 하이쿠는 그보다 더 짧게 말한다”고 극찬했다. 파운드가 이 시 덕분에 이미지즘 운동을 시작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시선을 집중하는 하이쿠는 시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양 문인들을 매료시켰다. 근대 초기 일본에 영어나 의술을 가르치러 왔던 사람들도 반했다. 미국 학교에서 글쓰기 교육의 하나로 하이쿠 창작 수업을 하고 있다니, 가장 짧은 동양의 시가 서양 문화의 한 자락으로 스며든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또 다른 하이쿠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1763~1827)는 봄날의 하루를 ‘세 푼을 내고/ 봄 안개 구경했네/ 망원경으로’라고 노래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온 서양 문물 중에 흥미로운 것이 망원경이었다. 당시 화폐로 세 푼(三文)이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망원경이 돈 가치만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옇게 흐린 것이 어쩌면 망원경 탓이 아니라 봄 안개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봄 안개 구경을 신식 물건으로 했다는 걸 자랑할 수 있다면, 촌사람으로서는 두 푼만큼이라도 건지긴 한 셈이다. 농민 출신으로 서민적인 애환을 잘 담아낸 잇사답다.

그의 시 중 가장 빛나는 걸 따로 꼽으라면 단연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를 들겠다. 말이 필요 없는 절창이다. 조금이라도 설명을 덧붙이면 되레 구차해진다. 꽃 소식을 기다리며 환하게 웃음 짓는 우리 또한 생판 남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