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HR협회] 거중조정(居中調停)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오늘의 정세를 엿보다

오늘날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긴박한 상황에 부딪혀 있다고 볼 수 있다. 2018년에 이어 특히 올해에는 북한의 비핵화와 더불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지 남북한 국민은 물론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남북미 간에 긴밀한 협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제2차 미북 회담이 곧 성사될 전망에 있으며, 그 이후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형식을 통한 남북정상회담도 후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한일 간에는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문제 및 강제노역 배상 문제, 광개토대왕함의 동해 북한어선 구조활동과 관련한 일본 해상자위대 항공기의 저공비행 위협, 동해의 한일 병기 표기 문제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중국은 아시아 지역 패권국으로의 위상을 확보하고자 미국과의 경쟁을 의식하는 가운데 국방력의 정예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북한에 대해서는 동맹 차원의 영향력을 지속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주변 정세를 살피면서 우리가 꼭 상기해야 할 것은 당연히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관점에서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대외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이익은 어디에 미치어 있는지 정확히 진단하여 그에 합당한 논리와 정책을 추구해야 할 것이며, 국민들도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 역사를 반추해 보는 가운데 오늘날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조선 말기 이후의 한반도 정세를 살피면서 현재의 주변 정세를 읽어 보려고 시도해 본다.
우리의 역사에서 조선과 대한제국의 몰락을 상기하자면 주변 열강들의 대한반도 영향력을 쟁취하기 위한 암투와 조선 조정의 무능함에 저절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19세기 말 주변 열강은 동북아에서 한반도 분할을 세 번씩이나 시도했다. 첫 번째는 청일전쟁 발발 전 영국의 킴발리(Lord. Kimberley) 경이 남쪽 4도를 일본, 북쪽 4도를 청의 영향권으로 하는 중재안을 제기했으나 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두 번째는 1896년 야마가다(山縣)-로바노프협정을 통하여 일본이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북쪽을 러시아의 영향권에, 남쪽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한다는 한반도분단 제의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거부하였다. 세 번째는 1903년 러시아가 자신들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1896년의 일본이 제의한 것을 역제의했지만 이번에는 일본이 거부하였다. 그야말로 당사국인 조선은 국력이 쇠잔하여 제대로 기능할 수가 없기에 강대국들끼리 한반도 문제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1975년의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1876년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성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마음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또 이를 시작으로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불란서 등 서구 여러 나라와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특히 미국과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조선은 제1조에 ‘거중조정’의 문구를 넣음으로써 조약 상대국이 제국주의적 침략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보호장치를 나름 갖추었다고 생각하였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의 대가로 다른 외국에 비해 미국에 금광채굴권 등 많은 유리한 이권을 주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광무)황제는 국제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짐작하고, 수차례에 걸쳐 미국 정부에 조약문에 공약한 바를 준수(?)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일본이 을사늑약(공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대하여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그 중재 역할을 호소하였으나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서로 양해하여 20년 동안이나 비밀로 유지하였으니, 당시 고종의 ‘거중조정’ 요청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의 남진을 방어하고 필리핀을 영구 장악고자 하는 의도와 조선은 부정부패가 심하고 자치능력이 없는 국가로 일본의 보호 및 감리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05년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하여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하였다.
이후 일본은 1910년 한일병탄을 통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데 이어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하여 많은 국가를 식민지화하여 침탈하였고, 1941년에는 미국의 대일 석유 수출 봉쇄를 이유로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유발하였다. 일본이 조선 말기 자국을 적극 지지해 준 미국에 대하여 30년 후에는 전쟁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국제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전쟁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미소 간 냉전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반도는 소련의 남진을 저지코자 하는 미국의 의지로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미소 간에 일정 기간 신탁 통치키로 하였다. 미국의 군비축소 영향으로 1949년 9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였고,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시킨 ‘에치슨 라인’이 선포되자 1950년 6월에는 북한이 이 틈을 노려 한국전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치열했던 한국전쟁은 외세의 영향 아래 1953년 7월 이후 휴전의 상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쟁 중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고, 1954년 1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한미동맹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그 이후 주한미군은 한반도 전쟁 방지와 주변정세 안정을 위하여 주둔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남북미 관계에서는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문제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한 논제로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언급하면서도 항간에는 ICBM급 외에는 그다지 미국의 큰 관심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와 함께 오바마 미국 대통령 시절에는 ‘전략적 인내’를 외치면서 왜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정을 그토록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내보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와 관련한 미국의 진정한 입지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추구되면 중국의 패권국 부상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한미군의 주둔에 대한 명분이 약화하고, 한국 국민들의 철수요구가 거세질 수도 있기 때문에 미국은 적절한 선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고 완충지대로서 한반도가 유지되는 선에서 중국과 협의하고 북미 간에 타결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설은 기우에 불과하기를 기도한다.
김용남 (한국HR협회 HR칼럼니스트, 숭실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