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호 칼럼] 반 고흐와 4차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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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고흐는 자연에서 생활하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던 헤이그파의 그림에 깊이 심취했었다.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않는 헤이그파는 바르비종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바르비종파는 파리의 남쪽 부근에 위치한 퐁텐블로 숲의 바르비종 마을 근처에서 작업하며 자연을 묘사하는 전원 풍경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고흐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러한 바르비종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들은 헤이그에 자주 모여 이야기하기를 즐겼기 때문에 헤이그파라 불렸다. 고흐는 헤이그에서 생활하며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화풍에 매료되었다.
그러던 1881년 12월 21일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이그파의 주요 인물이자 그의 삼촌인 모우베와의 사건 중 하나를 썼다. “나의 습작들을 보고 나서 모우베는 나에게 모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다고 충고했지.” 고흐는 그림의 색상이나 데생에서 어떤 망설임과 삶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느꼈고 또한 주제를 표현의 대상으로만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을 따를 수가 없었다.사실 이러한 고흐의 성향은 1880년 10월, 브뤼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그 곳에서 해부학과 원근법을 수강할 때도 아카데미의 규칙을 따르기 힘들다고 강조한바 있다. 당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는 고흐에게 “아카데미는 보다 심각하고 열정적이고 풍부한 사랑이 피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애인 같군. 이 애인을 떠나보내고, 자네의 진정한 사랑인 자연과 사실성에 몸을 맡기게.”라고 충고했다. 이는 반 고흐의 역정 전반의 중심을 이룬 문제였다.
미학적 원칙에 반하는 고흐의 태도는 1888년 의 작품에서 신발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그림 저편에 있는 신발 주인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이 그림은 단순히 ‘정물화’라기보다는 ‘초상화’ 같은 느낌을 준다. 특정 인물을 모델로 누군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모델로 누군가의 삶을 그리는 듯한 느낌은 친밀함과 신비로움, 정서적 감동을 자아낸다.
고흐가 편협된 사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은 피카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피카소는 3차원의 세계 즉 입체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표현하였고 이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연 계기가 되었다. 회화에서 사물의 객관성을 끌어내려는 피카소의 노력은 현대추상미술의 싹을 키웠고, 20세기의 건축·디자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형태와 재료 사용에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고 예술가는 특정한 유파나 사조에 속한다는 통념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카소를 어떤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일부 미술사가들이 그의 창작 생활을 다음의 몇 가지 시기로 나누기도 했다. 즉 청색시대(1901년~1902년 청색이 지배하는 작품), 청색~장미색 이행기(1904년), 장미색 시대(1905~1906년), 입체주의(1908~1914년), 앵그르풍 시대(1915년부터 사실적 초상화로 복귀), 초현실주의 (1925~1939년), 앙티브 시대(1946~1948년), 말년(1945~1973년) 등으로 나뉜다. 고흐와 피카소는 행보는 무엇보다 어느 한 가지 기치에 국한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그 어떤 어려움도, 근심거리나 장애물도 없는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 돼. 너무 쉽게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 교양 있는 계층에 속해 있고 훌륭한 지인들이 많고 또 가장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해도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자연인의 본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야 해. 그것이 없다면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뿌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영혼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해.”
1878년 4월 3일 고흐의 편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것이고 접근방식에는 끝이 없는 것처럼…
글.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ijeong13@naver.com)
그러던 1881년 12월 21일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이그파의 주요 인물이자 그의 삼촌인 모우베와의 사건 중 하나를 썼다. “나의 습작들을 보고 나서 모우베는 나에게 모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다고 충고했지.” 고흐는 그림의 색상이나 데생에서 어떤 망설임과 삶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느꼈고 또한 주제를 표현의 대상으로만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을 따를 수가 없었다.사실 이러한 고흐의 성향은 1880년 10월, 브뤼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그 곳에서 해부학과 원근법을 수강할 때도 아카데미의 규칙을 따르기 힘들다고 강조한바 있다. 당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는 고흐에게 “아카데미는 보다 심각하고 열정적이고 풍부한 사랑이 피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애인 같군. 이 애인을 떠나보내고, 자네의 진정한 사랑인 자연과 사실성에 몸을 맡기게.”라고 충고했다. 이는 반 고흐의 역정 전반의 중심을 이룬 문제였다.
미학적 원칙에 반하는 고흐의 태도는 1888년 의 작품에서 신발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그림 저편에 있는 신발 주인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이 그림은 단순히 ‘정물화’라기보다는 ‘초상화’ 같은 느낌을 준다. 특정 인물을 모델로 누군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모델로 누군가의 삶을 그리는 듯한 느낌은 친밀함과 신비로움, 정서적 감동을 자아낸다.
고흐가 편협된 사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은 피카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피카소는 3차원의 세계 즉 입체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표현하였고 이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연 계기가 되었다. 회화에서 사물의 객관성을 끌어내려는 피카소의 노력은 현대추상미술의 싹을 키웠고, 20세기의 건축·디자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형태와 재료 사용에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고 예술가는 특정한 유파나 사조에 속한다는 통념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카소를 어떤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일부 미술사가들이 그의 창작 생활을 다음의 몇 가지 시기로 나누기도 했다. 즉 청색시대(1901년~1902년 청색이 지배하는 작품), 청색~장미색 이행기(1904년), 장미색 시대(1905~1906년), 입체주의(1908~1914년), 앵그르풍 시대(1915년부터 사실적 초상화로 복귀), 초현실주의 (1925~1939년), 앙티브 시대(1946~1948년), 말년(1945~1973년) 등으로 나뉜다. 고흐와 피카소는 행보는 무엇보다 어느 한 가지 기치에 국한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그 어떤 어려움도, 근심거리나 장애물도 없는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 돼. 너무 쉽게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 교양 있는 계층에 속해 있고 훌륭한 지인들이 많고 또 가장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해도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자연인의 본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야 해. 그것이 없다면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뿌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영혼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해.”
1878년 4월 3일 고흐의 편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것이고 접근방식에는 끝이 없는 것처럼…
글.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ijeong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