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고사, 조지훈

고사

조지훈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서역(西域) 만리(萬里)ㅅ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태헌의 한역】
古寺(고사)敲打木魚不勝眠(고타목어불승면)
姸麗童僧忽入睡(연려동승홀입수)
世尊無語作微笑(세존무어작미소)
輝燿霞下牡丹墜(휘요하하모란추)

[주석]
敲打(고타) : 두드리다. / 木魚(목어) : 목탁(木鐸). / 不勝眠(불승면) : 졸음을 이기지 못하다.
姸麗(연려) : 곱다, 예쁘다. / 童僧(동승) : 동자승(童子僧). / 忽(홀) : 문득. / 入睡(입수) : 잠에 들다, 잠이 들다.
世尊(세존) : 부처님. / 無語(무어) : 말이 없다. / 作微笑(작미소) : 미소를 짓다.
輝耀(휘요) : 밝게 빛나다, 눈이 부시다. / 霞下(하하) : 노을 아래. / 牡丹墜(모란추) : 모란이 떨어지다.

[직역]
고사목어를 두드리다 졸음 못 이겨
고운 상좌 아이는 문득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없이 미소 짓는데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한역 노트]
한역시의 ‘동승(童僧)’은 상좌 아이를 가리킨다. 원시(原詩)의 ‘서역 만리ㅅ길’ 구는 시에 넣기가 용이하지 않아 한역시에서는 부득이 생략하였다. 그러나 이 시의 대체(大體)를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역시는 4구로 구성된 칠언고시(七言古詩)로 압운자(押韻字)는 ‘睡(수)’와 ‘墜(추)’이다.
역자는 학창시절에 조지훈 선생의 이 시를 정말 너무나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졸졸 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급기야 이 시의 시상(詩想)과 시풍(詩風)을 흉내 낸, 아래와 같은 한시를 지어보기도 하였다.

客舍吟(객사음)
祭後欲眠不勝眠(제후욕면불승면)
東家童子入衾筵(동가동자입금연)
月光皎皎盈天地(월광교교영천지)
梧葉又飛客舍前(오엽우비객사전)객사에서 읊다
제사보고 자려다 졸음에 겨워
주인집 아이는 잠자리에 들었다
달빛은 휘영청 천지에 가득한데
오동잎이 또 객사 앞에 날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지은 학창시절의 이 한시를 역자는 일종의 패러디라고 생각하지만, 누가 표절로 시비를 건다면 그렇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화석(化石)이 되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흘러가버린 그 옛날이 그리워진다. 제사를 기다리다 내 하숙방에서 그예 잠이 들어버렸던 그 때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19. 7. 2.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