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3:0으로 자사고 손 들어준 이유는? [남정민 기자의 서초동 일지]

교육청의 전패입니다.

지난해 12월 부산 해운대고, 올해 2월 서울 배재고와 세화고, 그리고 지난 23일 서울 숭문고와 신일고가 교육청을 상대로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지정을 취소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내 법원이 3연속 학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학교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겠으나 법원 판단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자사고 지정·취소는 학교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 신중하게 이뤄져야 함에도 △자사고 운영 평가기준을 평가 직전에 통보하는 등 △교육청이 그 재량을 일탈·남용했다는 겁니다.


1라운드 : 부산 해운대고

부산지방법원 제2행정부는 지난해 12월 18일 해운대고가 부산교육청을 상대로 ‘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행정소송에서 해운대고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일단 해운대고는 자사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겁니다.2019년 자사고 10개가 무더기로 지정 취소된 뒤 각 학교들이 줄소송을 내 나온 첫번째 판결이었습니다.

해운대고는 부산교육청이 5년마다 시행하는 자사고 재지정 평가에서 기준 점수에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아 2019년 자사고 지정이 취소됐습니다.
그러자 해운대고 측은 "2014년부터 5년간의 학교 운영이 다 끝난 시점인 2018년 12월 31일이 돼서야 부산교육청이 평가지표를 공표했기 때문에 관련 절차가 위법하다"고 주장했습니다.해운대고 측 대리인은 "쉽게 비유하자면 음주 측정까지 다 완료된 시점에서 음주운전에 대한 기준이 갑자기 바뀌어 버린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해운대고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피고(부산교육청)는 교육정책의 수립 및 집행과 관련해 폭넓은 재량을 가지므로 자사고의 운영성과 평가를 위한 평가기준, 평가지표 등을 설정함에 있어서도 상당한 재량권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기준이나 평가지표의 설정이 객관적 합리성이나 타당성을 현저하게 결여한 경우에는 재량권의 일탈·남용에 해당돼 위법하게 될 수 있다. 2019년도 평가기준은 2014년도 평가기준과 비교할 때 새로운 평가지표가 신설, 변경 되거나 그 평가방식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변경은 원고(해운대고)에게 현저하게 불리한 것으로 원고가 미리 예측하기 어려운 것임에도 피고가 소급적용해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

-2020년 12월 18일 부산지법 제2행정부 자사고 지정취소처분 무효확인소송 판결문

2라운드 : 서울 배재고·세화고

부산 해운대고가 교육청을 상대로 승소하자 법조계에선 '비슷한 결과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2018년 말이 돼서야 공표된 자사고 운영성과 평가 기준은 교육부 지침 아래 일괄적으로 통보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난 2월, 서울 지역에서도 자사고 취소 처분이 위법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습니다. 2019년 7월 서울교육청이 배재고, 세화고 등 8개 자사고 지정 취소를 결정한 지 1년7개월여 만입니다.

재판부는 우선 자사고를 '고교평준화 제도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고교평준화 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획일성을 보완하기 위해 고교 교육의 다양화를 추진하고, 학습자의 소질·적성 및 창의성 개발을 지원하며, 학생 학부모의 다양한 요구 및 선택기회 확대에 부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 라고 정의했습니다.

이어 교육청의 처분에 대해 "심사대상기간이 이미 경과했거나 또는 상당 부분 경과한 시점에서 상대방(자사고)의 갱신 여부를 좌우할 정도로 중대하게 변경하는 것은 갱신제의 본질과 사전에 공표된 심사기준에 따라 공정한 심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요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앞 사건과 마찬가지로 교육청이 그 재량을 일탈·남용했다는 취지입니다.

3라운드 : 서울 숭문고·신일고

3라운드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자사고 지정취소 처분을 모두 취소하며, 소송비용은 피고(서울교육청)가 부담한다"고 주문을 읽었습니다.

재판부는 애초에 자사고가 도입된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교육과 학교제도에 관해 어떠한 제도를 도입해 시행해 왔다 하더라도 그 제도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 등이 발견될 경우 이를 시정해야 하는 것은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국가의 의무이며, 정책 변경이 필요한 경우에도 기존 정책을 신뢰한 당사자들의 신뢰보호를 위해 잘못된 정책을 반드시 유지하여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사건 학교들은 피고(교육청)로부터 자사고 지정을 받아 2010학년도부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대신 일반 사립고등학교보다 폭넓은 자율권을 향유해 왔다. 따라서 이 사건 학교들이 자사고로 지정돼 운영돼 온 것은 장기간 국가의 교육정책 방향에 따라 유인된 것임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

-2021년 3월 23일 서울중앙지법 제2행정부 자사고 지정취소소처분 무효확인소송 판결문

한편 서울교육청은 즉각 항소의 뜻을 밝혔습니다. 교육부도 개별 자사고들의 소송과 별개로 2025년 자사고 일괄폐지는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5월 수도권 자사고들이 자사고 일괄폐지 정책에 대해 ‘기본권 침해’를 주장하며 제기한 헌법소원도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화여대부고와 중앙고의 행정소송 1심 선고는 오는 5월 14일, 경희고와 한양대부고는 오는 5월 28일로 예정돼있습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