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먹방] 수해 딛고 일어선 구례 오일장 맛집 가야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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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기른 열무로 만든 시래기 해장국에 맛깔난 호남식 밑반찬
지리산 서남쪽 자락에 있는 전남 구례는 예로부터 먹을 것, 아름다운 경관, 넉넉한 인심으로 이름난 곳이다. 영·호남의 특산품들이 모여드는 구례 오일장에는 서민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식당이 있다.
시장통에서 개업한 지 20년 된 가야식당은 지난해 구례를 휩쓴 물난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수해의 아픔을 이겨낸 식당은 올해 새로 건물을 짓고 다시 문을 열었다. ◇ 수마 휩쓴 식당…가족 힘으로 새 건물 세워
지난해 일어난 물난리로 구례가 큰 피해를 봤다는 소식을 듣고 구례로 귀농한 한 지인의 안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뒤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번에 구례를 취재할 일이 있어 때마침 열린 구례 오일장을 찾았는데 시장 한 귀퉁이에 30여 년간 영업해오던 가야식당이 눈에 띄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번듯하게 세워진 신축 2층 건물이 옛날 그 가야식당이라는 것이다.
개업 축하 화환이 늘어서 있어 새로운 식당인가 했는데 가만 보니 가야식당 간판을 달고 있었다. 도무지 생소했다. 시장의 정겨운 손맛을 전해주는 것 같았던 낡고 허름한 단층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수해에 쓸려나가는 바람에 식당도 큰 피해를 보았고 이번에 새로 건물을 짓고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가야식당이 생긴 지 20년 만에 처음 보는 물난리로, 식당 건물까지 무너졌다는 것이다.
때마침 개업 첫날이라고 했다.
구례 오일장 점포들이 점심시간을 맞아 몰려든 사람들로 실내가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가방을 놓았던 자리를 양보받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서빙을 했다.
개업 첫날 어머니 박경자 씨를 돕기 위해 찾아온 딸 박미경 씨다.
박씨는 "물이 지붕까지 밀어닥치는 바람에 집안에 기름을 담아둔 드럼통이 쏟아져 가재도구와 집이 모두 기름 범벅이 됐다"며 "가재도구는 하나도 건지지 못했고, 흙으로 지어진 집도 무너져 온 가족이 돈을 보태 새로 집을 장만했다"고 말했다. ◇ 조연이 더 빛나는 호남 시장 백반
메뉴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식사는 시래기가 주재료인 해장국 하나뿐이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메뉴에 없는 백반을 시키기도 한다.
해장국은 국이 큰 그릇에 담겨 나오고, 백반은 작은 국그릇에 해장국이 나오는데, 조기 한 마리가 더 나온다.
잠시 후 구례의 여느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해장국과 조기, 맛깔난 호남식 밑반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래기가 듬뿍 들어간 얼큰한 해장국과 함께 짭조름한 조기 살이 입안에서 쌀밥과 어우러지니 새벽부터 일어나 화엄사 뒷산을 헤매고 다니느라 우거지상을 하고 있던 얼굴이 확 펴졌다.
삼천포에서 왔다는 옆자리 손님 중 한 명은 "왜 우리는 조기를 주지 않느냐"고 물어보다가 일행으로부터 "저건 백반이고 우리가 시킨 것은 해장국 아니냐"는 핀잔을 받는다. 해장국의 주재료인 시래기는 주인 박씨 부부가 직접 밭에서 기른 열무로 만든다.
해장국과 다른 반찬들 모두 말할 것 없이 깔끔했다.
국과 밥을 제외하고 꽈리고추 멸치볶음과 꼬막무침, 조기 등 모두 10가지 반찬이 가지런히 놓인다.
2년 전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반찬이 꼴뚜기 무침이었던 기억이 났다.
이번 정식의 주인공은 갑오징어 무침이었다.
톡 쏘는, 새콤달콤한 고추장소스에 버무려진 갑오징어 무침은 특히 맛깔스러웠다.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남김없이 먹었다.
이렇게 이 식당에서는 장이 설 때마다 시장에서 항상 만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닌, 구하기 힘든 제철 음식 재료로 만든 찬이 있다. 식당을 나오는 길에 딸 미경 씨가 예전 가게 사진이 필요한데 혹시 한 장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렇게 수해를 심하게 입었는데 지원을 좀 받았느냐고 물어봤더니 손사래를 친다.
큰일을 겪고도 다시 문을 연 식당이 고마웠다.
다음 구례를 찾을 때도 안심하고 찾을 곳이 있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
지리산 서남쪽 자락에 있는 전남 구례는 예로부터 먹을 것, 아름다운 경관, 넉넉한 인심으로 이름난 곳이다. 영·호남의 특산품들이 모여드는 구례 오일장에는 서민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식당이 있다.
시장통에서 개업한 지 20년 된 가야식당은 지난해 구례를 휩쓴 물난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수해의 아픔을 이겨낸 식당은 올해 새로 건물을 짓고 다시 문을 열었다. ◇ 수마 휩쓴 식당…가족 힘으로 새 건물 세워
지난해 일어난 물난리로 구례가 큰 피해를 봤다는 소식을 듣고 구례로 귀농한 한 지인의 안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뒤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번에 구례를 취재할 일이 있어 때마침 열린 구례 오일장을 찾았는데 시장 한 귀퉁이에 30여 년간 영업해오던 가야식당이 눈에 띄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번듯하게 세워진 신축 2층 건물이 옛날 그 가야식당이라는 것이다.
개업 축하 화환이 늘어서 있어 새로운 식당인가 했는데 가만 보니 가야식당 간판을 달고 있었다. 도무지 생소했다. 시장의 정겨운 손맛을 전해주는 것 같았던 낡고 허름한 단층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수해에 쓸려나가는 바람에 식당도 큰 피해를 보았고 이번에 새로 건물을 짓고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가야식당이 생긴 지 20년 만에 처음 보는 물난리로, 식당 건물까지 무너졌다는 것이다.
때마침 개업 첫날이라고 했다.
구례 오일장 점포들이 점심시간을 맞아 몰려든 사람들로 실내가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가방을 놓았던 자리를 양보받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서빙을 했다.
개업 첫날 어머니 박경자 씨를 돕기 위해 찾아온 딸 박미경 씨다.
박씨는 "물이 지붕까지 밀어닥치는 바람에 집안에 기름을 담아둔 드럼통이 쏟아져 가재도구와 집이 모두 기름 범벅이 됐다"며 "가재도구는 하나도 건지지 못했고, 흙으로 지어진 집도 무너져 온 가족이 돈을 보태 새로 집을 장만했다"고 말했다. ◇ 조연이 더 빛나는 호남 시장 백반
메뉴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식사는 시래기가 주재료인 해장국 하나뿐이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메뉴에 없는 백반을 시키기도 한다.
해장국은 국이 큰 그릇에 담겨 나오고, 백반은 작은 국그릇에 해장국이 나오는데, 조기 한 마리가 더 나온다.
잠시 후 구례의 여느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해장국과 조기, 맛깔난 호남식 밑반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래기가 듬뿍 들어간 얼큰한 해장국과 함께 짭조름한 조기 살이 입안에서 쌀밥과 어우러지니 새벽부터 일어나 화엄사 뒷산을 헤매고 다니느라 우거지상을 하고 있던 얼굴이 확 펴졌다.
삼천포에서 왔다는 옆자리 손님 중 한 명은 "왜 우리는 조기를 주지 않느냐"고 물어보다가 일행으로부터 "저건 백반이고 우리가 시킨 것은 해장국 아니냐"는 핀잔을 받는다. 해장국의 주재료인 시래기는 주인 박씨 부부가 직접 밭에서 기른 열무로 만든다.
해장국과 다른 반찬들 모두 말할 것 없이 깔끔했다.
국과 밥을 제외하고 꽈리고추 멸치볶음과 꼬막무침, 조기 등 모두 10가지 반찬이 가지런히 놓인다.
2년 전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반찬이 꼴뚜기 무침이었던 기억이 났다.
이번 정식의 주인공은 갑오징어 무침이었다.
톡 쏘는, 새콤달콤한 고추장소스에 버무려진 갑오징어 무침은 특히 맛깔스러웠다.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남김없이 먹었다.
이렇게 이 식당에서는 장이 설 때마다 시장에서 항상 만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닌, 구하기 힘든 제철 음식 재료로 만든 찬이 있다. 식당을 나오는 길에 딸 미경 씨가 예전 가게 사진이 필요한데 혹시 한 장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렇게 수해를 심하게 입었는데 지원을 좀 받았느냐고 물어봤더니 손사래를 친다.
큰일을 겪고도 다시 문을 연 식당이 고마웠다.
다음 구례를 찾을 때도 안심하고 찾을 곳이 있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