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혁명…정당한 평가 받지 못한 갑신정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78) 갑신혁명인가 정변인가
갑신정변이 첫 발생한 우정총국 건물.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혁명’

범인에게는 신비함을, 꿈꾸는 자에게는 마력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에게 종종 이용당한 말이다. 혁명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주제와 소재를 막론하고 전면적인 변혁, 또는 뒤바뀜을 뜻한다. 구조상 성공의 확률이 희박하므로 알려진 혁명들조차 대부분은 실패작들이다.

전근대의 한국은 내부 모순이 폭발 직전까지 축적됐어도 혁명을 유발할 요인은 부족했다. 기존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갖춘 자연재앙과 외부침략이 거의 없었다.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직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는 부족했고, 혈연 중심의 향촌 공동체들로 구성됐다. 특히 조선은 체제 유지를 절대가치로 표방한 성리학과 모든 권력을 그물망처럼 장악한 유림 집단 때문에 혁명의 발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는 개화기의 제2단계 과정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훗날 혁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 임시정부는 이 정변을 ‘갑신혁명당의 난’ 으로 정의하면서 '혁명'으로 평가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지금 종로의 조계사 옆인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수의 개화당원이 ‘문명개화’라는 시대적인 요청과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군사 정변을 시도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선언하고, 강령 등 실천방법까지 선포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군사력에 패배해 ‘삼일천하’로 끝났다. 주도자들과 참여자들은 살해, 망명, 처형, 투옥, 유배를 당하고,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무려 500~600여 명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역사학자로서 궁금하고, 한 인간으로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실패 위험성과 가족들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정변’을 계획했을까. 어떻게 학습하고 이론을 확립하고, 세력을 규합하며 훈련했을까, 왜 미숙했다고 비판받은 방식으로 추진하고 참혹한 실패를 겪엇을까.먼저 그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시킨 조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2번에 걸친 '양요(프랑스 및 미국 군함의 침공)'를 거친 후 1876년에는 일본과 최초의 근대 조약을 맺으면서 비자발적으로 개항했다. 이어 심해지는 내부모순과 개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고, 결국 청나라 및 서양과 불평등한 근대조약을 맺으면서 타율적으로 세계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와 중화론에 안주하던 조선은 질서의 근간이 흔들렸고, 서양 문물을 우위로 한 신세상의 도래는 불가피했다. 그런데도 조선 사회는 자주가 위협당하고, 혼란이 도래한다는 위기의식은 약한 듯했다. 개화파들은 서양문물을 이해한 상태였으므로 개방에 적극적인 태도였지만, 반면에 내부 모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했고, 개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갑신정변으로 표방된 그들의 개혁 목표는 김옥균이 집필한 『갑신일록』에 기록된 14개 조항에서 추측할 수 있다. 문벌 폐지와 인민의 평등권, 능력 중시의 관리선발, 토지세금법 개혁, 간악한 부패 관리들의 근절, 곡식대여제도의 영구폐지 등은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사회제도, 부패 등의 내부모순을 해결하는 사회개혁이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에 눈뜨고, 새 세상의 구현이라는 사명감을 자각한 이상주의자들은 어떠한 과정과 계기를 통해 이러한 세계관과 사회의식을 갖게 됐고, 현실에 관철하려 했을까. 개화파는 북학파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1876년 직후부터 일본에 파견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개항 후 30년 만에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한 근대국가였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후 입헌체제를 구상했고, 1870년부터 평민도 성을 허용했다. 1871년에 신분 해방령을 선포했고, 1872년에는 국민이 초등교육을 받게 했으며, 1873년에는 징병령을 발표해 평민의 입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877년에 유신의 반동세력인 무사 출신들과 서남전쟁을 치룬 후에는 자유민권 운동도 활발해졌다. 또한 영국에서 차관을 도입해 도쿄에서 요코하마 구간에 철도를 건설했고, 각종 분야에서 근대산업들을 발전시켰다. 이 무렵인 1871년 11월에 신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유럽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12개 나라를 순방하고 1873년 9월 귀국해 국가개조에 필수적인 대규모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개화파는 근대 서구국가를 모델로 삼고, ‘탈아론(脫亞論)’을 바탕으로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성공시켰다(성희엽, 『조용한 혁명』). 따라서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박영호·서광범·서재필 등의 개화세력들은 일본을 조선발전의 모델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갑신정변 직전 개항지인 제물포에 1884년 11월 14일 세워진 우체국 건물.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개화파는 학습, 견학, 이론구축, 정책 제정과 실천 등 많은 작업을 단기간에 추진했다. 주역인 김옥균은 1875년 전후부터 개화세력들을 규합했다. 1879년에는 개화승인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근대화 상황을 관찰하게 했고,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1881년 음력 12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개혁정치의 과정과 결과들을 참관하고, 실력 있는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이때 ‘탈아론’의 주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생각을 교류하면서 정보를 구하고 조언을 받는다.

귀국 도중인 7월에 시모노세키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한 사실을 들었던 그는 중요한 관직에 진출하면서 개화파 세력을 꾸준히 확장했다. 박영효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에 3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개화파인 서광범 등을 대동했다.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영향력 있는 정치인,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면서 조선의 문명개화를 결심했다. 이때 김옥균도 일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체류하면서 『치도약론(治道略論)』을 저술하였다. 또 조선 유학생들을 파견하게 해서 일본 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옥균은 1883년 3월에 귀국한 후에 프랑스를 모델로 삼아 박영효 등과 적극적으로 개화정책들을 추진했다. 신분제 폐지 등의 사회제도 대개혁과 산업발전, 학교설립과 국방 및 경찰력의 증강과 정비, 신앙의 자유 등의 ‘대경장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조선의 중립화라는 국가정체까지 제시했다(김영작, 『근대 한일관계의 명암』). 하지만 임오군란은 결국 개혁파들의 주장과 정책의 구현을 방해했다.

청국은 정권 장악 후 조선의 속방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친일적이며, 자주성을 표방한 개화세력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개혁을 방해했다. 또한 척결의 대상인 민씨 수구파들은 물론이고, 발전모델을 청나라의 양무운동으로 설정한 온건 개화파도 적대관계로 변해갔다. 결국 일본에 국채를 모집하러 갔다가 실패한 후 1884년 4월에 귀국한 김옥균과 개화파들은 결국 ‘위로부터의 대개혁’이라는 명분을 갖고 거사 즉 혁명을 준비했다.

때마침 1884년 봄부터 프랑스가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자 청나라와 프랑스 간에는 전쟁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5월 23일에 청나라는 1500명의 병력만을 남기고 철수했다. 이어 8월 들어 청나라가 패배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개화당은 청국이 군사행동을 못 할 것으로 추정했다. 9월(음력 8월)을 거사 시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0월 30일에 귀환한 일본공사에 거사 계획을 알리면서 공동작전을 제의했다.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00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구두약속을 받았으며, 일본은 군사행동에만 협력하며, 수구파 제거와 내정 개혁 등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동의까지 얻었다.

조선 최초의 우체국 총판을 지냈고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정변당시 사망한 홍영식의 동상.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12월 4일. 개화당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장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을 확보한 후 곳곳에서 수구파의 거물들을 처단하고, 다음 날인 5일에는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당 요인들과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 등 종친이 참여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외교관을 불러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의사를 전달했다. 또한 정강을 제정하고 6일 오전 9시경에는 이를 한양의 요소에 붙였고, 오후 3시에는 고종이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시각 청군은 1500명으로 궁궐을 공격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된 개혁군과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 살해됐다.

개화당과 갑신정변은 모델로 삼았던 일본의 침략과 일부 인사들의 친일행위로 인해 오해받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관직·토지·사상 등을 지키려는 유림(위정 척사파), 토지와 일상의 삶을 고수하는 백성(농민)과 달리 기득권과 가족까지 포기하면서 전체를 위한 개혁과 개화를 실천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또 갑신정변은 근대 사상의 탄생, 근대인의 출현에 공헌이 큰 미완의 혁명이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 번에 성공한 혁명도 없지만, 재시도되지 않은 혁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