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티은행, 한국 '규제 덫'에 질렸나…디지털 경쟁력 낙오 탓인가
입력
수정
지면A5
퇴직금 누진제 있는 유일한 은행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씨티은행의 한국 소비자금융사업 철수가 알려진 직후인 16일 아침 “씨티그룹의 결정은 특정 국가에서의 실적과 역량 문제가 아니라 수익을 개선할 수 있는 부문에 집중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취지”라는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냈다. 한국 금융당국이 나서 미국 씨티그룹의 입장을 확인해준 셈이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씨티의 철수는 규제 때문이라기보다는 국내 대형 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 등에 밀려 경쟁력을 상실한 게 가장 큰 이유”라고 강조했다.
한미은행과 화학적 결합 '미완성'
강성노조 반발에 호봉-연봉 공존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적응 못해
몸집 키우는 대형銀·핀테크에 밀려
경쟁력 저하→수익 하락→철수
씨티의 한국 사업 축소가 ‘K규제 때문이 아니다’란 당국의 설명은 은행권의 시각과는 차이가 있다. 국내 은행들은 “대형은행과 경쟁에서 밀린 이유가 크다”고 보면서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국내 노동 및 금융규제와 특유의 연공서열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한국씨티은행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지털, 비대면화로 바뀌는 금융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국내 은행들도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규모의 경제’에서 밀려
기업금융을 주로 하던 씨티은행 서울사무소는 외환위기에서 살아남은 한미은행을 2004년 인수했다. 국내 소비자금융 시장에선 ‘메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업 초기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국내에 소개하고, 직장인 신용대출 등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였다. 국내 은행도 한국씨티은행의 새로운 시도에 뒤따랐다.그러나 씨티은행은 대형화하는 국내 은행들에 서서히 밀렸다. 한미은행을 인수한 2004년은 외환위기 이후 이어진 은행 간 구조조정이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한 은행 관계자는 “한미은행의 덩치가 애초에 작은 편이어서 경쟁이 쉽지 않은 구도가 펼쳐졌다”고 말했다.‘강성 노조’가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한국씨티은행 노동조합은 옛 한미은행 시절부터 금융노조 내부에서 ‘강경파’에 속했고, 씨티은행 편입 후 수차례의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더욱 강경해졌다. 2000년대 대부분 국내 은행이 노사 합의로 없앤 ‘퇴직금 누진제’가 유일하게 남아 있을 정도다. 희망퇴직 시에도 시중은행에 비해 최대 두 배, 10억원이 넘는 돈을 받은 씨티은행 직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같은 경직된 고용문화는 미국 본사 눈높이엔 한참 벗어나 있었다. 국내에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이후 은행권에 일반화된 ‘PC 셧오프제’도 본사에선 이해하기 힘든 제도로 꼽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씨티그룹 직원들이 “한국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해불가 호봉제’…은행들 ‘남 일 아냐’
노동문화와 호봉제에 대한 씨티그룹 내부의 비판도 많았다. 한국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의 HR(인사관리) 임원은 글로벌 본사와 소통할 때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외국인 임원들에게 ‘호봉(hobong)’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미은행 출신과 씨티은행 서울 본점 출신 간 ‘화학적 결합’이 인수 17년이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 기존 한미은행 직원들은 호봉제, 옛 씨티은행 직원들은 연봉제를 유지하고 있는 게 대표적 사례다.사회공헌 액수까지 지적하는 사회 분위기와 금융당국의 배당 간섭, 오락가락 대출 규제 등 ‘관치 금융’이 심화되면서 씨티그룹 본사도 한국에서 사업 의욕이 떨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씨티은행의 한 임원은 “미국 본사의 자금세탁 방지 및 컴플라이언스(내부통제)에 허가 위주의 국내 규제가 2중, 3중으로 더해지니 신사업을 추진하기 힘든 구조였다”고 말했다.은행권에선 이런 문제는 한국씨티은행만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호봉제와 경직적 노동문화, 촘촘한 규제망 등은 다른 은행에도 똑같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전통 은행업이 비대면과 디지털 금융으로 바뀌는 가운데 씨티은행 사업 축소가 오히려 ‘신의 한 수’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김대훈/정소람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