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국 칼럼] 네 가지 마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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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나이가 들어가고 목회연륜이 많아 지다보니, 주변에서 여러 가지 일들, 사건을 직 간접으로 보게 된다. 그런 사건들은 대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왜 저럴까? 하는 것 들이다. 그럴 때마다 반면교사 삼아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 사건, 일들을 보거나 뉴스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다산 정약용이다. 우선 그의 글을 보자.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이런 이유로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했다. -중략-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을 둔 사업이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인용.)위 글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처음으로 기거를 하며 살았던 집에 대한 기(記)일부이다. 선비들의 글을 읽다가 보면 기(記)가 많이 나온다. 다산시문집 제13권 에 나온다. 여기서 의(宜)는 “마땅하다”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당연하고 마땅히 지켜야 하고 살아야할 규범이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그것을 4가지로 정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채찍질을 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사의재는 노파가 운영하는 볼 품 없고 조그마한 주막집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 주막집 작은 쪽방일 것이다. 그곳에서 4년 동안 우거했다. 불혹의 나이인 마흔에 유배를 시작하는 다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유배를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승승장구 잘나가던 인생, 정조 왕의 총애를 받았던 장래가 유망한 인재였다. 그러던 그가 한양에서 수 백리 떨어진 강진으로 유배를 내려와 작고 허름한 주막집 쪽방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결기가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그 다짐이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 사의재(四宜齋)라고 손수 붓으로 글을 써서 조그만 편액을 방 입구에 걸어 놓았지 싶다. 그곳에서 다산의 제자들이 나왔다. 여러 제자들 중에 아전출신이며 호가 치원(巵園)인 황상(黃裳)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황상은 당시 추사 김정희가 인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가고 목회연륜이 켜켜이 쌓여가면서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은, 본분이란 단어를 많이 생각한다. 그 본분이란 직분에 맞는 마땅히 지키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목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이 있고, 성도가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이 있다.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눈살 찌푸리는 일들은 들여다보면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에서 벗어나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만약, 마땅히 지키고 살아간다면 아무문제도 없고 자연스럽고 편안할 것이다. 목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처음 목사가 되고자 할 때의 마음은 이러했다.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고 맡겨주신 영혼을 소중하게 잘 돌보겠노라고, 예수 마음을 품고 가난해도 그 마음 변치 않고 살아가겠노라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살아가겠노라고, 목양지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겠노라고. 이제 그런 첫 다짐과 생각을 수십 년이 지난 후 돌아본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첫 다짐과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는구나 생각이 든다. 이제 남은 목회기간을 다시 한 번 다잡아 본다. 다산이 사의재(四宜齋)라는 편액을 조그만 방 입구에 내걸고 자신을 성찰하듯.
<한경닷컴 The Lifeist> 고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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