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최선과 최고…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 1939년 서울 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갈증이며 샘물인』 『광휘의 속삭임』 등 출간.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후회는 꼭 뒤늦게 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삶의 ‘노다지’인 줄 한 참 뒤에야 깨닫게 되지요. 그때 ‘더 열심히 파고들고’ 그 사람에게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하고 뉘우쳐 보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늦게라도 그걸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어쩌면 남보다 빨리 발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땅에서도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이지요.

옛사람들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해서 어떤 일에 미치지 않고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년 전에도 그런 ‘미친’ 사람들이 많았지요. 타고난 재주는 없었지만 남보다 몇십, 몇백 배 노력해 일가를 이룬 인물들…. 그중에 머리가 너무 나빠 고생하면서도 엽기적인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당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오른 김득신(1604~1684)이 있습니다. 그는 나이 스물이 되어서야 겨우 글 한 편을 지을 정도로 ‘둔재’였지요. 우여곡절 끝에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도 늘 외워 읽기를 반복해야 공부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독수기(讀數記)’가 유명하지요. 그는 책을 읽을 때마다 횟수를 적어뒀습니다.
‘『백이전』은 1억1만3000번을 읽었고 『노자전』 『분왕』 『벽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은 2만 번을 읽었다. …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 『사기』 『대학』과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싣지 않았다.’

이때의 1억은 지금의 10만을 가리키는 단위이므로 그가 실제 『백이전』을 읽은 횟수는 11만3000번입니다. 곁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노력을 거듭해서 그는 마침내 큰 시인이 되었지요.
그는 진전이 없는데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바보(?)였습니다. 하지만 끝이 무디다 보니 구멍을 뚫기가 어려울 뿐, 한 번 뚫게 되면 크게 뻥 뚫리는 법이지요. 한 번 보고 안 것은 얼마 못 가 남의 것이 되지만 피땀 흘려 얻은 것은 평생 내 것이 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방대한 저술을 남긴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1741~1793) 역시 그와 동시대를 살다 간 사람입니다. 그는 찬 방에서 책을 읽다 동상에 걸리고, 손가락이 부어 피가 터지는 지경에도 책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쓰며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땔감이 없어 냉방에서 견디다 『한서』 한 질을 이불처럼 늘어놓고 『논어』를 병풍 삼아 겨울밤을 지새웠던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그는 누구보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그 속에서 얻은 지혜로 실학의 새로운 지평을 활짝 열었지요.

그에게는 책이 곧 세상이고 삶이며 우주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옛날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다”며 선현들의 지혜에 못 미치는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했지요.

요즘 세상에 ‘깜짝 실적’으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천재는 많습니다. 지나치게 반짝이는 순간의 재주만 잘 팔리는 경향도 있지요. 그러나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한 우물을 ‘열심으로’ 파는 노력파의 결실이야말로 더디지만 훨씬 크고 빛나게 마련입니다.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주인공은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모든 순간’을 ‘꽃봉오리’로 살다 간 마니아들이죠. 그들은 격변의 시기를 앞장서 개척하며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선도했습니다. ‘뼈아픈 시련을 자기 발전의 밑바탕으로 삼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사람들,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우뚝 세워 올린 노력가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한 시대의 앙가슴과 만나려 했던’ 그들의 삶을 비춰보면 애틋한 마음이 절로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세계 책의 날’입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