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종교가 된 환경주의…'과학의 메스' 들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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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바짝 마른 북극곰이 살얼음판을 걷는 모습이 위태롭다. 인간이 내다 버린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박힌 바다거북은 연신 가쁜 숨을 내뱉는다. 죽은 고래의 위장에선 비닐 쓰레기가 한 무더기 쏟아지고, TV 뉴스는 대도시를 엄습한 초대형 태풍, 100년 만에 닥친 이상 고온 소식을 전하기 바쁘다. 인간이 자행한 환경 파괴, 인류가 초래한 기후변화는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현실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게 과연 진실일까.
마이클 셸렌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664쪽│2만2000원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부키)은 환경주의의 ‘비과학성’과 이른바 환경주의자들의 ‘위선’을 까발린 책이다. 2008년 타임에 의해 ‘환경 영웅’에 선정됐던 유명 환경운동가라는 저자의 이력에서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내용이 담겼다. ‘친환경적’ 정책이 만들어낸 것이 지옥과도 같은 현실이라는 역설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종말은 없다(Apocalypse Never)’는 원제처럼 낭만적 환경운동이 조장했던 멸종에 대한 공포,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기반이 허술한지를 가차 없이 드러낸다.책은 일관되게 대중의 환경 관련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꼼꼼한 과학적 데이터를 동원해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을 전복한다. 예를 들어 예외적인 기상이변은 과거에 비해 오늘날 크게 늘어난 게 아니다. 1900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 플로리다에 상륙한 대규모 허리케인은 18건이었던 반면, 1960년부터 2018년까지는 11건에 지나지 않았다. 1920년대에 전 세계에서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540만 명이었다. 2010년대엔 인구가 네 배로 늘었지만 자연재해 사망자는 40만 명에 불과했다.
환경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재난도 ‘실상’이라기보다는 ‘허상’에 가깝다고 말한다.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생산한 산소는 그 지역의 식물과 미생물이 모두 소비하기에 ‘지구의 허파’라고 부르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화전민이 줄면서 1998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화재로 소실되는 숲의 면적은 25%나 감소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플라스틱이 분해된 덕에 해수면에 떠 있는 미세 플라스틱 양은 당초 예상치의 100분의 1로 줄었다. 1960년대에 비해 미국의 고기 생산량이 두 배 늘어나는 동안 온실가스 배출은 11% 감소했고, 평균 기온이 올라도 관개시설 개선 등에 힘입어 전 세계 식량 생산은 증가했다.소위 환경주의자들이 환경을 살리는 ‘정답’에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경우도 다반사다. 제조업과 도시의 발달은 자원의 효율성과 집약도를 높인 진정한 ‘친환경 처방’이지만 이를 경원시한다. 환경을 지키고 싶다면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물을 이용해야 하지만 정반대 길을 걷는다. 맹목적으로 기술의 힘을 반대하고, 원자력처럼 효율이 높은 발전원을 배제하면서 오히려 토지 부족과 식량 가격 상승, 저개발국 빈곤 심화를 조장한다. 저자는 환경주의자들이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데 원자력 외엔 대안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연한 공포라는 ‘주홍글씨’를 원자력에 씌워왔다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허점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환경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환경주의가 일종의 세속종교가 됐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는다. “세상이 12년 안에 멸망할 것”이라는 식의 종말론적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환경주의는 기성 종교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이름으로 설파되면서 미신과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왔다. 여기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영웅과 악당의 구분을 통해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면서 기성 종교색이 옅은 고학력 중산층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본문만 600쪽에 가까운 책 전편에 드러난 환경주의의 민낯은 추악하다. 세상사를 흑백으로 나누려는 시도도 위험하기 그지없다. “과장과 거짓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과학과 사실에 근거하라”는 저자의 당연한 주문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김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