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관능에 예술의 자유를 담은 화가, 클림트[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1907~1908) / 빈 벨베데레 미술관
눈앞에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것만 같습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몽환적인 분위기도 물씬 풍깁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렬한 사랑의 이미지로 각인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대표작 '키스'입니다. 이 작품엔 무려 여덟 가지 종류의 금박이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 화려하고 찬란한 금빛 덕분에 작품 속 남녀의 입맞춤이 더욱 관능적이면서도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영원한 사랑을 이룬 것 같은 황홀함도 느껴집니다.

이 그림 덕분에 우리는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의 이름을 잘 알고 있는데요. 작품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고, 실제 클림트는 어떤 의미를 담고 싶어 했는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클림트는 평생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지도 않았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알고 싶다면 나의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봐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작품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요. 스스로는 말하지 않았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동경했던 '황금빛 화가' 클림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그는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귀금속 세공사였는데요. 아버지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 클림트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부터 뛰어난 감각과 재능을 물려받았습니다. 훗날 금빛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지켜본 덕분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특출한 재능 덕분에 그는 14세에 빈 미술공예 학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졸업 후엔 친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극장의 천장화 등을 그렸는데요. 그의 훌륭한 솜씨 덕분에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이때까지의 작품들은 우리가 아는 그의 그림들과 많이 다른데요. 고전주의 화풍을 고스란히 따랐죠. 그러다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클림트가 서른이 되던 해 찾아온 시련이었죠. 그의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가 잇달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겁니다. 그는 정신적인 충격에 빠져 3년 가까이 작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 예술가로서 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하게 됐죠. 그리고 가까스로 이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작업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새로운 예술 정신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빈 분리파(Wien Secession)'가 만들어진 것이죠. '분리파'는 말 그대로 '기존의 것으로부터 나뉘어 떨어져 나온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빈미술가협회가 주도하는 미술 시장의 흐름에서 탈피하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오스트리아에선 고전주의 화풍이 오래 지속되고 변화가 더디게 나타났는데요. 분리파는 여기서 과감히 벗어나 자유롭게 느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클림트는 1897년 분리파의 초대 회장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에곤 실레를 비롯해 오토 바그너, 칼 몰 등 회화부터 건축, 디자인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그와 뜻을 함께 했습니다. 빈 분리파가 당시 내세운 슬로건은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그는 이 기조에 걸맞게 파격적인 실험을 합니다. 1894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 대강당에 천장화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학문을 주제로 '철학' '법학' 의학' 연작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학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노골적인 표현이 많았죠. 삶과 죽음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혼란도 담겨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클림트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자 분리파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죠.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907) /노이에 갤러리
뜻을 같이 한 동료들로부터 외면을 받으면,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회의감이 들 법도 한데요. 클림트는 오히려 분리파로부터 '분리'를 선택합니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진정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죠. '키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다나에' 등 그의 대표작은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 이 황금기에 탄생했습니다.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온 또 다른 논란이 있는데요. 그의 작품이 '과연 예술인가, 외설인가'하는 논란입니다. 클림트의 작품엔 관능적인 표현들이 많은데요. 그의 에로티시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하려 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에밀리 플뢰게'(1902). /빈 미술관 카를스플라츠
실제 클림트의 사랑은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사후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 확인 소송을 내기도 했죠. 그런데 그에겐 서로 4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에밀리 플뢰게 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플뢰게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였습니다. 클림트는 플뢰게를 동경했으며 그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끝까지 플라토닉 사랑을 이어갔죠. '키스'에 나오는 여성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플뢰게가 주인공이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클림트는 뇌출혈과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마지막 발작을 일으키며 부른 사람의 이름도 플뢰게 였다고 합니다.

클림트가 가는 길엔 늘 수많은 논란과 지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가 됐습니다. 빈을 '클림트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보고 즐기기 위해 그곳을 찾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구현할 수 있을지 정확히 알고 그 길을 가는 것. 이 과감한 도전 정신과 의지가 클림트가 가졌던 자신감의 원천이 아니었을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