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건희 컬렉션'은 따로 있다?…미공개 작품 봤더니 [강경주의 IT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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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의 IT카페] 1회
삼성家, 이건희 컬렉션 2만1600여점 기증
정선 인왕제색도, 고려 천수관음보살도 눈길
"문화유산 모으고 보존하는 것 시대적 의무"
1998년3월 삼성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삼성 일가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생전 수집한 미술품들을 국민 품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면서 국내외 미술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번 기증 목록에는 피카소, 모네, 달리 등 해외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김환기, 이중섭 등 국내 작가들의 초일류 걸작품들이 포함돼 있어 더 주목을 끈다. 이와 함께 이번 기증 목록에서 빠진 미술품도 덩달아 관심을 받고 있다.
"삼성은 우리 국민, 우리 문화 속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룬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행복한 눈물'부터 스티브 잡스가 가장 좋아한 작품까지
지난 28일 삼성가는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해온 미술품 2만1600여점을 사회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이 중 국보가 14점, 보물 46점이 포함돼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사상 최고의 기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번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미술품들이 있다. 주로 서양 현대미술 작품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세간에선 "미공개 작품이 진짜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평가도 나온다.대표적으로 2007년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꼽힌다. 당초 이건희 회장의 개인 소유로 알려졌으나 당시 삼성 측이 그림 구매 사실을 부인했고,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가 자신이 구매해 보관하고 있다며 공개까지 하면서 현재는 삼성가의 작품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현재 이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고 당연히 이번 기증 목록 대상에서도 빠졌다.미술계가 기대했던 작품들은 또 있다. 시가 1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III', 삼성전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스티브 잡스, 그가 생전 가장 좋아한 것으로 전해진 미국 현대미술 거장 마크 로스코의 '무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두 개의 촛불'. 이 작품들은 소장자가 이 회장 개인이 아닌 삼성문화재단으로 돼 있어 애초부터 상속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가치 높은 작품들 면면 뜯어보니
기증 목록에 포함된 작품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기증품은 겸재 정선의 말년작인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다. 가로 138.2cm, 세로 79.2cm 크기의 대작으로 정선의 400여 점 유작 가운데 가장 크다. 국보 217호인 '금강전도'와 함께 조선후기에 꽃피운 진경문화를 상징하는 걸작이다. 고려불화인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와 '수월관음도'(비지정문화재)의 존재도 두드러진다. 고려불화는 예술성, 희귀성면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문화재다.한국 근현대 회화사의 대표작들도 대거 포함됐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등이다. 박수근은 3, 4호짜리 소품을 주로 그렸지만 '절구질하는 여인'은 이례적으로 60호짜리 대작이어서 희귀성이 높다. 박수근의 20호 크기 '빨래터'가 2007년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걸 감안하면 단순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3배인 135억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모네, 샤갈, 미로, 피카소, 르누아르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인상주의 이후 서양 근대 걸작들도 대거 기증됐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등이 대중 공개를 기다리고 있다. 모네의 작품은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번 기증품과 비슷한 크기가 940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이 작품들을 기증받기로 한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동안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미술 작가 작품만 소량 소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모네와 피카소 작품이 단 한 점도 없었던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선 단번에 위상이 올라가게 됐다."문화재·골동품 한데 모아야 가치 생겨"
질적 양적으로 역사상 최고의 기증이라는 호평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돌연 보관 장소에 대한 논란도 발생했다. 기증품들이 가치를 가지려면 전국 각지로 흩어지는 것보다 한 곳에 모여 전시 관리를 해야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는 게 미술계에서 나오는 우세한 시각이다.'이건희 컬렉션'은 대구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제주 이중섭미술관, 강원 박수근미술관 등 지역 미술관 5곳과 서울대 등에도 총 143점을 기증하기로 했다. 전남도립미술관에는 의재 허백련, 오지호, 김환기, 천경자 등 지역 작가 9명의 작품 21점이 간다. 대구미술관에는 이인성, 김종영 등 대구 작가의 작품 21점을 안겼다.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의 유화와 드로잉 등 18점을 기부받았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재다, 골동품이다' 하는 것은 한데 모아야 가치가 있다"며 "골동품도 10만명이 10점씩 갖고 있어 봐야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철기, 자기, 사화 이런 질 좋은 것들이 1억점 이상 모여있는 곳이 루브르 박물관이고 대영박물관이고, 미국의 스미소니언"이라며 "만일 이들 박물관 물건을 전 국민이 서너 점씩 나눠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1997년 이건희 회장 에세이에서는 "상당한 양의 빛나는 우리 문화재가 아직도 국내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실정이고 이것들을 어떻게든 모아서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여야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며 "보통 사람들 일상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선진국들처럼 박물관, 전시관, 음악당 등 문화 시설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2004년 10월 리움 개관식 연설에서는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저와 삼성은 이곳 리움이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의 예술이 함께 숨쉬는 열린 문화의 공간이 되도록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