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가치 외교'에 발끈한 北, 최고 약점은… [송영찬의 디플로마티크]

하루에만 대미·대남 비방 담화 세개 쏟아내
인권 문제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
바이든 '가치 외교'에 거부감
북한 주민들이 지난달 15일 이른바 '태양절(김일성의 생일)'을 맞아 평양 만수대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에 참배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무성 대변인은 대류행전염병으로부터 인민의 생명안전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국가적인 방역 조치를 ‘인권 유린’으로 매도하다 못해 최고존엄까지 건드리는 엄중한 정치적 도발을 하였다.”

북한이 지난 2일 외무성 대변인 명의로 발표한 대미(對美) 비방 담화의 일부분입니다. 이날 북한은 하루에만 세 개의 비방 담화를 내놓았습니다. 특히 미국이 북한 주민들에 대한 정권의 인권 침해를 지적한 것에 “목숨보다 더 귀중하고 가장 신성한 우리의 최고존엄”이라며 유독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같은날 대북 전단을 살포한 탈북민 단체를 ‘쓰레기’로 지칭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는 수위가 약하게 비춰질 정도입니다.

"인권은 곧 국권" 궤변 쏟아낸 北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 연합뉴스
이 담화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국무부의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겨냥했습니다.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북한인권 단체들이 주도한 ‘북한자유주간’을 맞아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 국가 중 하나”라며 “김정은 정권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유엔과 같은 생각을 가진 동맹국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열악한 인권 문제에 대한 책임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 돌린 것입니다.

미 국무부의 성명에는 “코로나19를 대응한다는 구실로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북·중 국경 지역에서 내린 사살 명령 등 북한 정권이 취하는 점점 더 가혹한 조치들에 대해 우리는 경악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앞서 유엔 인권이사회와 여러 국제인권단체가 지적한 ‘국경지대 학살’까지 언급한 것입니다. ‘최고존엄 모독’을 거론한 북한은 “우리에게 있어서 인권은 곧 국권”이라며 미국이야말로 인권 침해국이라고 맞받아칩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은 인권에 대해 거론할 자격조차 없다”며 “사회적 불평등과 인종 차별로 무고한 사람들이 매일과 같이 목숨을 잃고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부터 무려 58만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한 미국이야말로 인권의 불모지, 세계 최악의 방역 실패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총기류 사건에 의한 사망자가 한 해에 4만명을 훨씬 넘어서고 각종 범죄가 판을 치는 곳이 바로 미국이 그토록 자찬하는 ‘문명의 세계’”라고 덧붙입니다.


북한은 “미국과 세계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 우리는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력해 외교와 단호한 억지를 통해 양국이 제기하는 위협에 대처할 것”이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28일(현지시간) 의회 연설에도 화살을 돌렸습니다. 권정근 북한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은 “우리를 미국과 세계의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걸고들면서 외교와 단호한 억제를 운운한 것은 늘 듣던 소리”라면서도 “미국 집권자가 첫 시정연설에서 대(對)조선 입장을 이런 식으로 밝힌 데 대해서는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이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을 직접 비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국의 北인권 침묵은 계속될까

조선중앙통신이 2일 보도한 지난달 30일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된 '청년전위들의 결의대회' 모습./ 연합뉴스
북한은 인권을 앞세운 바이든 미 행정부의 ‘가치 외교’에 불편한 심기를 여과없이 나타냈습니다. 특히 인권을 지적한 국무부 성명에는 외무성 대변인 명의로, 북핵을 위협으로 규정한 대통령 연설에는 외무성 미국 담당 국장 명의로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인권 지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때부터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인권과 민주주의를 대외 정책의 우선순위로 거론하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미국 민주당의 대외 정책 기조와도 일맥 상통하지만, 그보다는 중국·러시아·북한·이란 등을 겨냥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유독 북한 인권 문제에는 침묵해왔습니다. 한국은 지난 3월 미국, 일본, 영국, 호주, 유럽연합(EU) 회원국 등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이름을 올린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 불참했습니다. 올해로 3년 연속입니다. 같은 달부터 세계 각국과 국제 인권단체들이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거세게 반발한 대북전단금지법(개정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도 시행됐습니다. 미 의회 산하 초당적 기구인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는 지난달 관련 청문회를 개최하고 “문재인 정부는 이 법으로 북한으로의 모든 정보 유입을 범죄화했다”고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미 의회에서 한국 인권을 콕 찝어 청문회를 개최한 것은 유신 정권 시절인 1977년 이후 처음입니다.북한이 이날 내놓은 담화 중에는 김여정의 대북 전단 비방 담화도 있었습니다. 김여정은 “남조선 당국은 탈북자 놈들의 무분별한 망동을 또다시 방치해두고 저지시키지 않았다”며 “우리가 어떤 결심과 행동을 하든 그로 인한 후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더러운 쓰레기들에 대한 통제를 바로 하지 않은 남조선 당국이 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대북전단금지법은 지난해 6월 김여정이 “구차하게 변명할 생각에 앞서 그 쓰레기들의 광대놀음을 저지시킬 법이라도 만들고 애초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못하게 잡도리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라고 한 뒤 제정됐는데, 마치 ‘왜 제대로 집행 안 하냐’고 다그친 모양새입니다.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방남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접견장에 먼저 입장해 문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허문찬기자 sweat@hankyung.com
통일부는 이날 “대북전단 살포 문제와 관련해서는 경찰이 전담팀을 구성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를 위한 취지에 부합되게 확실히 이행돼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힙니다. 만일 정부가 탈북민들을 상대로 전단 살포 행위만으로 징역 3년형에 처하는 대북전단금지법 집행에 나선다면 국제사회의 반발은 불보듯 뻔합니다. 앞서 미 국무부는 “탈북민들과 인권 공동체의 용기를 존경하며 이러한 심각한 불의를 조명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언제나 지지할 것”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북한자유운동연합의 전단 살포는 미국 의회의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던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회장의 후원 아래 진행됐습니다.

대북 정책은 오는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심 의제가 될 전망입니다. 문제는 한·미 양국의 대북 시각차가 날로 커져만 간다는 점입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톱다운’ 방식의 미·북 협상은 물론, 정부에서 연일 운을 띄우는 대북 제재의 일부 완화, 종전선언을 모두 거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신 협력, 대중(對中) 견제 노선 참여 등 외교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북한의 비방담화 ‘삼연타’는 한국의 외교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 전망입니다.

송영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