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수업 불안에…사설시험 몰리는 학부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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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發 학력저하·격차 우려맞벌이 부부인 강모 차장(42)은 요즘 자주 연차휴가를 낸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아직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 같은 학년 친구들이 배우는 두 자릿수 곱셈과 분수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보다 못한 강씨가 직접 학습 지도에 나섰다. 그는 “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 원격교육이 시작된 뒤 아이의 학습 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며 “사설시험을 본 뒤 맞춤형 과외를 알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험 없어 아이 수준 확인 못해
초등생 경시대회 응시 33% 급증
공교육 불신에 사교육 내몰려
사립초 입학 경쟁률도 역대 최고
"정확한 학력진단 시급" 지적
뜨거운 사설시험 응시 열기
코로나19 장기화로 학력 저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사설시험을 찾는 학부모가 부쩍 늘고 있다. 2일 치러진 ‘전국 영어·수학 학력경시대회’의 1~3학년 대상 영어·수학 경시대회 응시 인원은 2019년 4040명에서 올해 5400명으로 33.7% 불어났다.초·중·고 전체 응시 인원은 같은 기간에 비해 5.2% 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응시자가 유독 크게 늘어났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온라인 수업이 장기화하면서 초등 저학년 아이의 학습 능력을 점검하고 싶어 하는 부모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종로학원하늘교육의 올해 초등학생 회원 수도 전년 대비 약 10% 늘었다. 학령인구 감소로 최근 몇 년간 역성장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상승세다.
이처럼 사설시험에 학부모가 몰리는 까닭은 초등학교에서 시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어릴 때부터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진보 교육단체 반발에 밀려 2017년 이후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서 지필 시험을 폐지했다. 이에 따라 원격수업으로는 기초 학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올해 사립초등학교 경쟁률이 역대 최고를 기록한 것도 코로나19 장기화 여파라는 게 교육계의 중론이다. 올해 서울 사립초등학교 38곳의 입학 경쟁률은 평균 6.8 대 1로, 작년(2.0 대 1)보다 세 배 이상 높아졌다. 경쟁률이 10 대 1을 넘은 곳도 10곳이나 됐다.
서울 서초동에서 초등 2학년 딸을 키우는 김모씨(43)는 “작년 공립학교의 부실한 원격수업과 시험 부재에 실망한 뒤 ‘사립학교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한다’는 엄마가 많았다”며 “강남에선 사교육 선호도가 더 높아져 시험 봐야 들어갈 수 있는 일부 학원 경쟁률이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사·학부모 1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학부모의 72.6%가 원격수업 상황에서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답했다.
현실화된 학력 저하
학력 저하에 대한 학부모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총 240개교 학생 11만285명을 대상으로 한 ‘2020 학생역량 조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초6·중3 학생 역량지수는 각각 65.47점, 65.63점으로 2016년 조사 시작 후 가장 낮았다. 학생역량지수는 자기 관리, 지식정보 처리, 창의적 사고, 공동체 역량 등 각 분야 점수를 합산한 것이다.학력 양극화도 심화하고 있다. 부모의 경제력과 가정환경에 따라 교육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최근 서울교육청 산하 서울교육정책연구소가 시내 382개 중학교 3학년의 작년 성적을 분석한 결과 국어·영어·수학 모두 중위권 학생이 감소했다. 조사 결과 B∼D등급 비율은 2019년보다 과목당 평균 9.87%포인트 줄었다. 반면 상위권 A등급과 하위권 E등급 비중은 늘어 학력 양극화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우려가 커지자 교육부는 각 시·도 교육청을 통해 “관할 초·중·고에서 기초 학력 진단을 실시하라”고 지난 3월 권고했다. 하지만 서울 대부분 초등학교는 지필 시험 대신 심리정서검사, 학생 상담 등을 했다. 그 결과도 학부모와 학생에게만 전달되기 때문에 아이의 학습 능력이 또래 학생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서울교육청 관계자는 “기초 학력 보충을 지원하기 위한 도구일 뿐 결과를 취합해 학력 격차를 정밀하게 분석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전국 단위의 정확한 학력 진단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현욱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정책본부장은 “아픈 곳을 모르면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지금이라도 교육부 차원의 학력진단평가를 실시하고 필요한 학생에게는 추가 학습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임수현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미국은 ‘모든 학생 성공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가 차원에서 기초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한국은 학력 저하에 대한 우려만 있을 뿐 데이터가 부족해 학생 지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학력 격차가 더 커지기 전에 교육당국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만수/김남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