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우의 Fin토크] 은성수 위원장의 '솔직한 심정'

임현우 금융부 기자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5일 금융권 최고경영자(CEO)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한경DB
국내 한 자산운용사는 비트코인에 간접 투자하는 펀드를 조용히 준비해 왔다. 주식 공모형 펀드 시장이 맥을 못 추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디지털 자산에 대한 젊은 층의 투자 수요가 확실해 보이는 만큼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이 상품은 ‘제대로 된’ 비트코인 펀드로 보기 어렵다. 암호화폐 채굴, 결제 등의 사업을 벌이는 국내외 상장사 주식을 많이 담는 주식형 펀드로 설계됐다. 미국처럼 금융상품에 암호화폐를 직접 편입하는 게 한국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금융감독원 승인을 거쳐 5월 중순부터 판매에 들어간다는 계획에 큰 차질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얼마 전 급제동이 걸렸다고 한다. 출시가 연기된 이유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금융당국 앞에 자진해서 ‘모난 돌’이 될 금융회사는 대한민국에 없다.

코인정책 '타이밍' 놓쳐버린 정부

3년 만에 더 크게 불붙은 암호화폐 투자 광풍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놓고 정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규제하자니 암호화폐의 존재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방치하자니 거품이 터진 후 뒷감당이 무서운 딜레마에 빠졌다. 통일된 해외 사례가 있으면 베끼기라도 할 텐데 각국의 대응도 제각각이다. 중국과 터키는 암호화폐를 금지한 반면 캐나다에선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가 나왔고, 프랑스는 암호화폐공개(ICO)를 법제화했다. 미국은 비트코인 선물은 허용했지만 ETF 승인은 망설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정부가 마냥 막는다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국경 없이 365일 24시간 거래되는 암호화폐 시장이다. 자산운용사의 신상품은 금융당국이 차단할 수 있지만, 고위험을 끌어안고 스스로 뛰어드는 투자자는 통제 불가능이다. “제도권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는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발언은 말 그대로 솔직한 심경 고백이다.

코인 투자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은 위원장,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사실 “투자는 본인 책임”이라는 그의 말은 금융당국 고위 관료로서 당연한 얘기다. ‘어른’이란 표현을 문제 삼아 은 위원장 해임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은 ‘너 잘 걸렸다’ 수준의 여론재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정부의 진짜 실책은 다른 데 있다고 본다. 코인 가격이 폭락하면서 거래가 뚝 끊겼던 2018~2019년에 손을 놓고 있었던 점이다. 거래소에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지우는 ‘특정금융정보법’과 암호화폐 수익에 과세하는 ‘소득세법’을 개정하긴 했다. 다만 국제기구 권고나 해외 과세 사례를 따른 것일 뿐 암호화폐에 대한 논의 자체는 멈춰버렸다. 당시 코인 시세가 가끔 들썩일 때 금융위 당국자들에게 입장을 물었지만 매번 “큰 문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치 프리미엄(해외 시세 대비 웃돈)’이 사라진 것을 보면 국내는 잠잠하니 특별한 대응이 필요 없다는 논리였다.

규제? 방임? 명확한 입장 정해라

3년 만에 다시 불어난 코인 투자자들은 독해졌다. 자신들의 인생 역전을 가로막는 무엇도 만들지 말라고 한다. 금융위·금감원에 블록체인 정책을 조언해준 한 교수의 얘기다. “2017~2018년 투자자들은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이 미래 기술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호기심이 있었죠. 지금은 투기 목적을 숨기지 않아요. ‘미래는 모르겠고, 난 여기서 돈 벌 거야’죠.”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에 암호화폐 책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공부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타이밍은 연애에만 중요한 게 아니라 정책에도 중요하다. 이제 정부는 ‘솔직한 심정’만 털어놓을 게 아니라 ‘솔직한 정책’을 내놨으면 한다. 선택지는 딱 두 가지일 것이다. 1번은 제대로 규제하는 방법이다. 일본처럼 암호화폐 산업을 규제하는 업권법을 만들고 코인 상장부터 투자자 보호까지 촘촘한 규정을 마련하면 된다. 2번은 제대로 방치하는 방법이다. 앞으로도 암호화폐를 인정할 뜻이 전혀 없으니 수익을 얻든 손실을 보든 본인 책임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정부에 한 가지 부탁 더. 암호화폐가 계층 이동의 마지막 사다리로 둔갑한 이 지경까지 온 이유를 복기해보고 ‘솔직한 사과’도 곁들이면 좋겠다. 금융권 전문가들은 코인 투자 열풍이 금융시장의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돈 복사 파티’가 끝난 이후 사회적 리스크를 더 걱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