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란 잘란] 100년 넘은 축음기가 150만원…자카르타의 골동품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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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점 100여개 모인 '잘란 수라바야' 1970∼1980년대 전성기 [※ 편집자 주 : '잘란 잘란'(jalan-jalan)은 인도네시아어로 '산책하다, 어슬렁거린다'는 뜻으로, 자카르타 특파원이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는 연재코너 이름입니다. ]
"이게 우리 가게에서 파는 가장 비싼 물건인데, 100년이 넘은 축음기에요.
가격은 2천만 루피아(150만원)고요. " 아앙(62)씨가 지난 7일 오후(현지시간) 한 평 남짓한 가게 안쪽에 보관된 축음기의 레버를 몇 차례 돌리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몇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축음기는 골동품점 100여개가 모인 자카르타 시내 맨뗑의 수라바야 거리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수라바야는 본래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이름인데, 서울의 인사동, 황학동 거리 같은 자카르타 골동품 거리 이름이 '잘란 수라바야'(JL.Surabaya)로 붙여졌다.
1960년대부터 조성된 이 거리는 1970∼1980년대 최고 전성기를 이뤘으나 이후 점점 쇠락하던 중 코로나 사태라는 결정타를 맞았다.
본래 점포 수는 200개가 넘지만, 일부는 가방가게로 바뀌었고 남은 골동품 가게들도 손님들 발길이 끊기면서 문을 닫은 곳이 많다. 아앙씨는 이 곳 '잘란 수라바야'에서 반세기를 보냈다.
그는 "친구를 따라 1969년 열 살 때부터 이곳에서 일했다"며 "골동품을 팔아 번 돈으로 세 자녀를 키웠다"고 연합뉴스 특파원에게 말했다.
이어 "1970년대 초반부터 1988년 정도까지 정말 장사가 잘됐다.
그때는 늘 손님이 북적였고, 한 달에 수억 루피아(수천만원)씩 돈을 벌었다"며 과거의 영광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이어 "지금은 진짜 손님이 없다.
4월 한 달 내내 번 돈은 200만 루피아(15만원)가 전부"라며 한숨 쉬었다.
아앙씨의 가게를 천천히 돌아보니 오래된 시계 30여점부터 축음기, 그릇, 도자기, 사진기, 현미경, 촛대까지 다양한 골동품이 진열돼 있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배 시절 사용됐다는 일본 산요 흑백 TV와 필립스 라디오는 각각 250만 루피아(20만원), 200만 루피아(15만원)에 판다고 한다. 잘란 수라바야의 골동품점에서 파는 골동품은 중개인, 수집가들이 전국에서 모아온 것들이다.
인도네시아는 17세기부터 340년간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1942년부터 3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산 골동품과 일본산 골동품들이 인도네시아산 골동품들과 함께 팔린다.
1972년부터 이 거리에서 일했다는 오모(64)씨는 "친척이 골동품 가게를 차려 일하게 됐다"며 "중개인들이 수라바야, 족자카르타, 스마랑 등 지방 도시에서 각 가정이 보관한 골동품들을 모아 공급했는데, 지금은 반둥 등 가까운 곳에서 많이 가져온다"고 말했다.
이어 "진품과 이미테이션(짝퉁)이 있는데, 나 같은 사람들은 한눈에 척 알아본다"며 "이건 700만 루피아(55만원)에 파는 램프고, 이건 네덜란드 식민시절 쓰던 그릇들"이라고 보여줬다. 오모씨 역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점점 손님들 발길이 끊기더니 지금은 상권이 완전히 붕괴했다"며 "예전에는 유럽인, 호주인 등 외국인 손님이 하루 5명은 물건을 샀는데, 지금은 한 달에 2명이 살까 말까 하다"고 말했다.
그는 "골동품 가게 주인이 2세대로 많이 바뀌었는데, 2세대들은 온라인·SNS판매도 하지만 나 같은 1세대 주인들은 그냥 앉아서 손님을 기다린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본인을 포함한 1세대 주인들은 녹 제거 등 골동품 수리 기술이 있어서 그걸로 조금씩 돈을 벌고 있다고 전했다.
잘란 수라바야를 돌아보니, 가게마다 주로 취급하는 품목이 달랐다.
오랜 기간 함께 장사하면서 암암리에 조율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잘란 수라바야의 골동품 가게들이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을까.
앞서 택시 기사는 특파원이 "잘란 수라바야에 가 달라"고 하자 곧바로 "악어 가방을 사고 싶으면 소개할 곳이 있다"고 나섰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잘란 수라바야에 대한 인식이 '골동품'보다는 '가방'으로 옮겨가는게 아닌가 싶다. /연합뉴스
"이게 우리 가게에서 파는 가장 비싼 물건인데, 100년이 넘은 축음기에요.
가격은 2천만 루피아(150만원)고요. " 아앙(62)씨가 지난 7일 오후(현지시간) 한 평 남짓한 가게 안쪽에 보관된 축음기의 레버를 몇 차례 돌리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몇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축음기는 골동품점 100여개가 모인 자카르타 시내 맨뗑의 수라바야 거리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수라바야는 본래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이름인데, 서울의 인사동, 황학동 거리 같은 자카르타 골동품 거리 이름이 '잘란 수라바야'(JL.Surabaya)로 붙여졌다.
1960년대부터 조성된 이 거리는 1970∼1980년대 최고 전성기를 이뤘으나 이후 점점 쇠락하던 중 코로나 사태라는 결정타를 맞았다.
본래 점포 수는 200개가 넘지만, 일부는 가방가게로 바뀌었고 남은 골동품 가게들도 손님들 발길이 끊기면서 문을 닫은 곳이 많다. 아앙씨는 이 곳 '잘란 수라바야'에서 반세기를 보냈다.
그는 "친구를 따라 1969년 열 살 때부터 이곳에서 일했다"며 "골동품을 팔아 번 돈으로 세 자녀를 키웠다"고 연합뉴스 특파원에게 말했다.
이어 "1970년대 초반부터 1988년 정도까지 정말 장사가 잘됐다.
그때는 늘 손님이 북적였고, 한 달에 수억 루피아(수천만원)씩 돈을 벌었다"며 과거의 영광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이어 "지금은 진짜 손님이 없다.
4월 한 달 내내 번 돈은 200만 루피아(15만원)가 전부"라며 한숨 쉬었다.
아앙씨의 가게를 천천히 돌아보니 오래된 시계 30여점부터 축음기, 그릇, 도자기, 사진기, 현미경, 촛대까지 다양한 골동품이 진열돼 있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배 시절 사용됐다는 일본 산요 흑백 TV와 필립스 라디오는 각각 250만 루피아(20만원), 200만 루피아(15만원)에 판다고 한다. 잘란 수라바야의 골동품점에서 파는 골동품은 중개인, 수집가들이 전국에서 모아온 것들이다.
인도네시아는 17세기부터 340년간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1942년부터 3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산 골동품과 일본산 골동품들이 인도네시아산 골동품들과 함께 팔린다.
1972년부터 이 거리에서 일했다는 오모(64)씨는 "친척이 골동품 가게를 차려 일하게 됐다"며 "중개인들이 수라바야, 족자카르타, 스마랑 등 지방 도시에서 각 가정이 보관한 골동품들을 모아 공급했는데, 지금은 반둥 등 가까운 곳에서 많이 가져온다"고 말했다.
이어 "진품과 이미테이션(짝퉁)이 있는데, 나 같은 사람들은 한눈에 척 알아본다"며 "이건 700만 루피아(55만원)에 파는 램프고, 이건 네덜란드 식민시절 쓰던 그릇들"이라고 보여줬다. 오모씨 역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점점 손님들 발길이 끊기더니 지금은 상권이 완전히 붕괴했다"며 "예전에는 유럽인, 호주인 등 외국인 손님이 하루 5명은 물건을 샀는데, 지금은 한 달에 2명이 살까 말까 하다"고 말했다.
그는 "골동품 가게 주인이 2세대로 많이 바뀌었는데, 2세대들은 온라인·SNS판매도 하지만 나 같은 1세대 주인들은 그냥 앉아서 손님을 기다린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본인을 포함한 1세대 주인들은 녹 제거 등 골동품 수리 기술이 있어서 그걸로 조금씩 돈을 벌고 있다고 전했다.
잘란 수라바야를 돌아보니, 가게마다 주로 취급하는 품목이 달랐다.
오랜 기간 함께 장사하면서 암암리에 조율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잘란 수라바야의 골동품 가게들이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을까.
앞서 택시 기사는 특파원이 "잘란 수라바야에 가 달라"고 하자 곧바로 "악어 가방을 사고 싶으면 소개할 곳이 있다"고 나섰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잘란 수라바야에 대한 인식이 '골동품'보다는 '가방'으로 옮겨가는게 아닌가 싶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