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5·18] ② 발 벗고 나선 광주…5·18 세계화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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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지원금 5천180만원 극비리 송금 추진…외국 민주화 직접 지원 첫 사례 "어디에서든 41년 전 광주의 악몽은 되풀이돼선 안 됩니다. "
학살에 가까운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미얀마를 바라보는 광주 시민들의 마음이 모였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을 겪은 광주는 누구보다 미얀마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올해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윈민트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인사들을 구금하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건 5·18 기념재단이었다. 5·18 세계화를 위해 아시아권 민주·인권 운동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재단은 쿠데타 소식이 알려진 직후 곧바로 규탄 성명을 내고 군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오월 정신을 잇는 세계 각국의 민주 인사들에게 수여한 광주 인권상 역대 수상자 29명도 민주주의 복원과 유엔의 개입을 요구하며 힘을 보탰다.
광주 시민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미얀마 지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80년 5월이 생각나 무척 괴롭다"면서도 오월어머니들은 소복을 입고 미얀마 지지 집회를 열었고,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는 물건을 두드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미얀마의 '딴봉띠' 집회를 재현하기도 했다.
각종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종교·정치·여성·청년·노동단체에서도 미얀마인을 지지하고 군부를 규탄하는 성명이 잇따랐다. 그러나 미얀마에선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상황은 더욱 악화할 뿐이었다. 미얀마 시위를 지지하는 '마음'만으론 부족했다.
그들에게 직접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광주는 41년 전 그날처럼 다시 한번 연대의 힘을 발휘하기로 했다.
'미얀마 광주 연대' 이름으로 뭉친 광주 시민들은 미얀마에 생필품과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중·고등학생들도 5·18 광장에 나와 바자회 모금 활동을 통해 손을 보탰다.
높은 관심을 보여주듯 모금액은 4월 말 기준으로 한 달여 만에 1억5천900만원이 모였다.
누군가는 미얀마 시위대를 위해 마스크 3천개를 기부하기도 했다.
익명의 기부자 201명을 포함해 개인 기부자만 1천330명에 달했고, 104개 단체가 선뜻 지원금을 내놨다.
미얀마 연대는 가능하면 이 지원금을 모두 현지에 직접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광주 시민들이 외국의 민주화운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첫 번째 사례로, 늘 구호로 외치던 5·18 세계화를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군부를 피해 미얀마 시위대에 거액의 자금과 물품을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국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지원금을 조금씩 쪼개 현지로 전달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18 세계화를 위해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권 민주 인사(단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재단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차로 보내는 지원금은 5·18을 상징하는 5천180만원으로 정해졌다.
군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탓에 구체적인 경로는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재단을 주축으로 한 미얀마 광주 연대의 활발한 활동으로 불붙은 미얀마 지지 운동은 서울과 인천 등으로 퍼져나갔다.
서울에선 미얀마 군부를 두둔하고 있는 중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고, 포스코 등 미얀마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에 대해서도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울과 인천시교육청은 미얀마 민주주의와 관련한 초중고 교육자료를 개발·배포할 계획이다.
이러한 상황은 미얀마 현지에도 전해져 미얀마 시민들은 SNS를 통해 '고마워요 한국(#ThanksKorea)'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5·18 기념재단 이기봉 사무처장은 "당장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참여와 연대를 통해 지켜질 수 있다"며 "미얀마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국민들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얀마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난민이 많이 생기고 있고, 그들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며 "이런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해 대응하는 게 필요한 만큼 전국 지지 모임을 연대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학살에 가까운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미얀마를 바라보는 광주 시민들의 마음이 모였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을 겪은 광주는 누구보다 미얀마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올해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윈민트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인사들을 구금하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건 5·18 기념재단이었다. 5·18 세계화를 위해 아시아권 민주·인권 운동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재단은 쿠데타 소식이 알려진 직후 곧바로 규탄 성명을 내고 군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오월 정신을 잇는 세계 각국의 민주 인사들에게 수여한 광주 인권상 역대 수상자 29명도 민주주의 복원과 유엔의 개입을 요구하며 힘을 보탰다.
광주 시민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미얀마 지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80년 5월이 생각나 무척 괴롭다"면서도 오월어머니들은 소복을 입고 미얀마 지지 집회를 열었고,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는 물건을 두드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미얀마의 '딴봉띠' 집회를 재현하기도 했다.
각종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종교·정치·여성·청년·노동단체에서도 미얀마인을 지지하고 군부를 규탄하는 성명이 잇따랐다. 그러나 미얀마에선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상황은 더욱 악화할 뿐이었다. 미얀마 시위를 지지하는 '마음'만으론 부족했다.
그들에게 직접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광주는 41년 전 그날처럼 다시 한번 연대의 힘을 발휘하기로 했다.
'미얀마 광주 연대' 이름으로 뭉친 광주 시민들은 미얀마에 생필품과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중·고등학생들도 5·18 광장에 나와 바자회 모금 활동을 통해 손을 보탰다.
높은 관심을 보여주듯 모금액은 4월 말 기준으로 한 달여 만에 1억5천900만원이 모였다.
누군가는 미얀마 시위대를 위해 마스크 3천개를 기부하기도 했다.
익명의 기부자 201명을 포함해 개인 기부자만 1천330명에 달했고, 104개 단체가 선뜻 지원금을 내놨다.
미얀마 연대는 가능하면 이 지원금을 모두 현지에 직접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광주 시민들이 외국의 민주화운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첫 번째 사례로, 늘 구호로 외치던 5·18 세계화를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군부를 피해 미얀마 시위대에 거액의 자금과 물품을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국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지원금을 조금씩 쪼개 현지로 전달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18 세계화를 위해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권 민주 인사(단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재단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차로 보내는 지원금은 5·18을 상징하는 5천180만원으로 정해졌다.
군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탓에 구체적인 경로는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재단을 주축으로 한 미얀마 광주 연대의 활발한 활동으로 불붙은 미얀마 지지 운동은 서울과 인천 등으로 퍼져나갔다.
서울에선 미얀마 군부를 두둔하고 있는 중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고, 포스코 등 미얀마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에 대해서도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울과 인천시교육청은 미얀마 민주주의와 관련한 초중고 교육자료를 개발·배포할 계획이다.
이러한 상황은 미얀마 현지에도 전해져 미얀마 시민들은 SNS를 통해 '고마워요 한국(#ThanksKorea)'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5·18 기념재단 이기봉 사무처장은 "당장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참여와 연대를 통해 지켜질 수 있다"며 "미얀마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국민들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얀마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난민이 많이 생기고 있고, 그들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며 "이런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해 대응하는 게 필요한 만큼 전국 지지 모임을 연대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